‘할인분양 받은 세대 절대 입주불가.’
대구 수성구의 한 입주아파트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현수막에 쓰인 내용이다. 이 아파트가 올 들어 시끄럽다. 새로 분양받은 입주예정자의 이사를 기존 입주자들이 입구에서부터 막고 있어서다. 기존 입주자들로 구성된 이 아파트 비상대책위원회가 ‘건설사가 기존 입주자를 배제한 채 새 입주자에게만 10∼30% 분양가를 깎아줬다’면서 ‘기존 입주자에게도 똑같은 조건으로 위로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 벌이고 있는 집단행동이다. 비대위는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새 계약자들의 입주를 계속 저지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해당 건설사는 이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기존 계약자에까지 분양가 할인을 소급적용하면 엄청난 손실이 예상된다는 게 이유다.
■분양가 할인판촉 기존입주자·신규계약자 갈등
14일 건설업계 등에 따르면 아파트 미분양해소를 위한 건설사들의 ‘떨이 마케팅’이 연초부터 열기를 뿜고 있는 가운데 미분양에 대한 ‘분양가 할인’ 판촉 전략이 기존 입주자와 새 계약자 간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기존 입주자들이 할인분양을 조건으로 계약한 신규 계약자들의 ‘입주 저지’를 통해 기존 입주자들에게도 동일한 수준의 혜택을 돌려받으려고 건설업체를 압박하는 기막힌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
집값이 계속 하락하는 시점에서 변경된 조건을 소급적용받지 못한 기존 계약자들의 불만은 계속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에 따라 다양한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미분양 마케팅을 적극 벌이고 싶어도 기존 계약자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대형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최근 건설사들이 미분양 판촉을 위해 무료옵션 등 사실상 분양가 할인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기존 계약자들이 소급적용을 요구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면서 “하지만 건설사가 이에 응해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실력행사 등으로 계약자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소송 등 법적 다툼으로 치닫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수성구의 이 아파트에서만 지금까지 서너차례 실력행사가 있었다. 할인 분양을 통해 계약한 가구의 이사차량 진입을 막은 것은 물론 아파트 열쇠까지 빼앗아 갔다. 더구나 할인분양을 받은 가구의 동·호수가 적힌 게시문을 엘리베이터 앞에 붙여놓고 인테리어업자 등에게 공사를 못하도록 엄포까지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분양가 할인을 통해 나중에 계약한 입주예정자들은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이사를 하다 입구에서 저지당한 사례도 최소 3가구는 된다는 게 건설사 측의 설명이다. 이들은 이삿짐을 임시창고에 보관하고 인근 친인척 집에 숙박하면서 건설사에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기존 입주자들이 자신들의 동·호수를 공개하면서 ‘할인아파트’라고 낙인찍는 것에 대해 “소름끼치는 행동”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법정타툼으로 비화
당혹감에 빠진 해당 건설사는 결국 이 아파트 비대위 대표를 ‘업무방해’와 ‘강도’ ‘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형사고발했다.
전문가들은 시장상황에 따라 분양가를 정하고 이를 다시 인하하는 등의 방법은 기업활동의 고유업무라고 강조한다. 계약자는 그때 그때에 맞게 시장논리에 따라 상품성을 보고 투자하는 것일 뿐 손실에 대해 건설사가 책임질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 같은 아파트 분양이라도 여러 차례 시기를 달리해 분양하면서 그때 그때 분양가를 변경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미분양이 해소돼야 집값이 오르는 만큼 기존 입주자들이 미분양 마케팅을 용인해줘야 하는데 비상식적으로 대응하고 있어 해답이 안 보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법무법인 서현의 이장희 변호사는 “건설사가 시장상황에 따라 분양가를 인하했더라도 정상적인 거래로 아파트 매매가 이뤄진 만큼 기존 입주자들이 이를 저지하는 것은 업무방해에 해당하며 피해자 측은 민사상 손해배상 및 위자료 등의 청구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jumpcut@fnnews.com 박일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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