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연극 ‘강철왕’..스테인레스가 된 무용수의 이야기

박하나 기자
파이낸셜뉴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종종 벌어진다. 요즘 공연계도 그렇다. 꽤 대중적인 평론가조차 ‘빈틈이 많다’고 지적한 작품들이 큰 돈을 벌고 있다. 친숙한 노래와 영화에 뿌리를 둔 덕이다. 마니아층, 평론가,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지만 일반 관객들은 환호한다.

관객의 수준을 탓하는 목소리가 많다. 문화적 퇴행 현상이라고도 말한다. 막연한 우월감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치부하긴 좀 그렇다. 통속예술을 지향하더라도 창작은 의무다. 요즘엔 무대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찾아보기 참 힘들다.

그래서 고선웅작가, 아니 고선웅 연출자는 바쁘다. 그는 대학로에서 ‘기발함의 상징’으로 통한다.

고연출자는 1999년 ‘우울한 풍경 속의 여자’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이발사 박봉구’ ‘황금박쥐’ 등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오달수 주연의 연극 ‘마리화나’를 히트시키더니 연극‘삼도봉美스토리’,뮤지컬 ‘남한산성’ 작업에 참여 중이다.

지난해 연습실을 개조해 만든 마방진 극공작소에서 첫선을 보인 연극 ‘강철왕’엔 그의 개성이 잘 나타나있다. 모티브는 고 연출자가 쓴 동명의 시(詩)다. 전직 회사원인 그가 업무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스트레스, 스트레스, 스트레스…’란 단어를 노트에 쓴 게 발단이다. 이것이 나중에는 ‘스텐레스’로 보였고 결국 ‘강철왕’이란 작품으로 태어났다.

댄서를 꿈꾸는 주인공 왕기가 열처리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의상만 보면 무협극의 한장면같다. 주인공의 무용 실력도 예사롭지 않다. 고된 연습 탓인지 온 발가락과 무릎에는 붕대가 감겨있다.

‘혀를 깨물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에 그는 가업을 잇기로 하지만 직원들의 텃세가 만만치 않다. 마침 구조조정을 계획하던 아버지와 노동자들 간에 분란이 일어나고 왕기는 열처리 기구에 갇힌다.

모두들 그가 타 죽을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그는 스테인레스로 온 몸이 뒤덮인 ‘강철왕’이 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치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겠지만 그건 기우다. 강철왕이 됐다는 가정을 빼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다.

진로를 두고 벌이는 부자간 언쟁, 중소기업의 현실과 노사분규 등 어두운 구석을 해학 넘치는 대사로 풀어내니 코미디 그 자체다. 여배우들의 엽기적인 캐릭터도 한몫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기관총을 난사하고 오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데도 객석엔 별 찜찜함을 남기지 않는다. (단, 극중 권투선수를 지망하는 배우의 정체가 좀 모호하다.걸쭉한 목소리로 읊는 대사가 큰 웃음을 줄지언정 그의 역할이 꼭 필요한 것 같진 않기에)

문제는 국가정보원의 감시 아래 갇힌 강철왕이 탈출을 감행하는 순간부터다. 극의 전반부는 딱 고선웅표 작품처럼 재기발랄한데 갈수록 신파다.

‘왕기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라’는 친구와 ‘인류를 구할 심오한 연구 대상’이라는 의사, ‘밀려드는 CF 좀 찍자’는 아버지의 갈등이 구태의연하다. 자살을 선택한 강철왕과 참회하는 아버지, 눈물을 뽑아내는 배우들까지 한자리에 모아놓으니 결말은 더욱 뻔해진다. 이제껏 실컷 웃게 만들어놓고 갑자기 울리려는 연출자가 좀 야속하다. 그에게 기대한 것은 이런게 아닌데 말이다.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은 배우들의 뜀박질과 거침없는 대사에 먼지 범벅, 침 범벅이 됐다. 초반의 고무된 분위기를 끝까지 몰고 갔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퍽 신선하고 볼 만한 작품이라는데에 한 표 던진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 열정으로 가득찬 연출자를 만난 배우들은 광대가 아닌 예술가로 무대에 선다. 그런 의미에서 ‘강철왕’의 배우들은 예술가다. 이 작품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다음달 15일까지 볼 수 있다.

/wild@fnnews.com박하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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