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시론] 쌍화점과 알튀세/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1.20 16:50

수정 2009.01.20 16:50

영화 ‘쌍화점’의 주인공들은 철저하게 몰락한다. 왕과 무사와 왕비는 시인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더한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단 한 가지에 사로잡혀 옆을 보지 않는다. 몰락의 순간에도 사랑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버둥버둥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몰락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매료된다. 무언가에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혀 모든 것을 잃어도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부럽다.


그런 것이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사로잡힘에 대한 동경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동경의 근원은 스스로가 뿌리부터 계산적일 뿐만 아니라 그런 성정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전후 가장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추앙받는 알튀세는 그런 심리를 불편할 만큼 집요하게 분석했다. 그는 62세이던 지난 1980년 평생을 같이 한 사랑이며 정치적 동반자인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 스무살 이후 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드나들었고 이력상으로도 도무지 평균적이거나 일상적인 소시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런 그이지만 가슴이 터질 듯한 열정적 사랑에 빠졌을 때에도 극도의 가난에 허덕이던 연인에게 난로를 사주면서 속으로는 넉넉했던 자신의 생활비 부담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의 기억은 수십 년간 그를 쫓아다녔고 말년에 집필한 자서전에 소상히 기록됐다.

객기나 만용은 이런 본질적인 타산성을 부정하고 싶을 때 나타난다. 대개는 한시적인 일탈에 불과하다. 진짜 문제는 집단적인 객기다. 국민이 실용을 폄훼할 때 정부는 감정적이고 대중영합적인 정책을 좇는다. 복지를 위하고 약자를 위한다고 내세우며 다른 목표들과 비교한 우선순위나 효율적인 추진 방법은 따지지 않는다. 이런 정책들이 난립할 때 사회는 중심을 잃는다. 반대로 시행착오를 통해 성숙한 사회는 따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도 어떻게 하면 계속 도움에만 의존하지 않게 할지를 고민한다. 냉혹해서가 아니다. 그래야 가장 절실한 사람에게 도움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96년 미국의 복지개혁은 빈곤층에 대한 정부지원에 시한을 설정했다. 일정 기간 안에 일자리를 찾도록 강제한 것이다. 지난해 영국의 복지개혁안은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찾느라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난해도 그냥은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런 정책들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는 빈곤층(undeserving poor)’을 솎아내려 하기 때문에 냉정해 보이지만 실상은 이들을 자립시켜 빈곤에서 건져내고 정말 어려운 사람에게 지원을 집중하겠다는 냉철한 의지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정책은 그야말로 감성적이다. 일할 능력이 있든 없든 가난하면 무조건 지원한다. 우리 복지제도의 척추인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정 수준의 소득을 누구에게나 보장한다는 철학이다. 기준선 이하 소득의 세대에게 차액을 채워주니 일해서 벌 이유가 없다. 제도가 빈곤층의 자립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 공공일자리 사업도 유사하다. 민간의 일자리보다 노동 강도는 훨씬 낮으면서 보수는 비슷해 대상자는 다른 일자리를 찾을 이유가 없다. 지난해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공공근로사업 참여자 중 절반에 가까운 비율이 민간 일자리가 생겨도 일할 의사가 없다고 대답했다. 빈곤층을 지원할 때 근로능력자와 무능력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 근로능력자는 노동시장에 진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대원칙은 유독 우리나라에서 무시되고 있다.

적어도 정책에 있어서 사람을 구하는 것은 객기나 감성이 아니라 타산이다. 마음은 따뜻해야 하나 정책은 차갑게 따지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어려운 이를 점점 줄여나가기 위한 냉정한 노력은 더 중요하다.

사랑에 목숨거는 쌍화점의 왕은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 보는 왕은 한심하다.

나는 기꺼이 그와 연애하겠으나 절대 지갑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며 끊임없이 지갑의 남은 돈을 계산하고 있을 알튀세의 판단을 신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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