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무역입국의 그늘,밀수 밀화] <31> 여수 밀수사건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5.05 16:26

수정 2009.05.05 16:26



오래 전부터 남해안은 자타가 공인하는 황금어장으로 수산업이 발달한 곳이고 그 중심에 여수가 자리해 일거리와 돈이 흔했다. 그래서 ‘여수 가서 돈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회자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수산업 호황은 있어도 수산업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갑부는 적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 말이 밀수에서 나왔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지난 1975년 국내 10대 뉴스에 밀수사건이 하나 포함돼 있었다.

바로 ‘여수 밀수사건’으로 일명 ‘허봉용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때 여수시민은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했다. 당시 밀수가 어디 여수에서만 있었던 일이던가. 부산을 비롯해 충무(지금의 통영), 마산, 목포 등 남해안 대부분의 항구도 밀수가 성행했다. 그러나 여수에 제일 먼저 밀수꾼 검거 불똥이 튀도록 한 그럴만한 사건이 하나 터졌다. 바로 밀수꾼 아들이 지난 1975년 8월 5일 여수세관 수사직원을 살해한 것이다.

그로부터 1개월 후인 9월 11일 당시 김치열 검찰총장은 남해안 일대 해상밀수조직에 대한 일망타진을 전국 검찰에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여수는 나흘 전부터 대검찰청 특수1과장 김병리 검사가 이끄는 일단의 수사팀이 여수시 수정동 여수신항의 여수세관에 ‘여수지구 밀수폭력특별수사본부’를 설치,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수사반은 그해 9월 12일 1차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동안 여수항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밀수해 온 5∼6개파 40여명의 계보를 파악하고 1차로 속칭 갈매기파 두목 박동화 등 4명을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여수의 밀수조직은 자유당 때부터 뿌리박은 조직밀수꾼으로 소위 일본 쓰시마(대마도) 이즈하라특공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수사반은 밀수조직의 총두목격인 허봉용 등 10여명의 두목급과 운반담당 18명, 브로커 12명 등 40명을 수배 선상에 올렸다.

드디어 9월 22일 허봉용을 비롯한 5개파 밀수두목 4명 등 모두 82명을 구속하는 선에서 1차 수사가 종료되고 순천지청장을 단장으로 하는 새로운 합동수사반을 편성, 종전의 임무를 수행했다. 밀수 비호세력인 공무원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비난여론에 따라 칼날이 공무원을 향한 것이다.
2차 수사가 착수된 것. 결국 현직 경찰서장을 비롯해 10명의 공무원이 구속되고 경찰과 세관직원 167명이 교체되는 초유의 인사파문을 낳았다.

이렇게 해서 약 2개월 가까이 진행된 여수 밀수사건은 막을 내렸다.
여수반란사건 이후 최대의 사건이라 할 정도로 여파가 컸다.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사진설명=지난 1975년 9월 7일 여수밀수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 당시 여수세관 청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