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액 연봉에 각종 복지혜택, 노조를 등에 업은 '철밥통' 직장. 금융공기업의 이미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신의 직장' 금융공기업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달리 이면에서 조직은 곪아가고 있었다. 자율성 침해와 경쟁력 저하가 조직기반이 흔들리게 하고 직원 개인의 삶에도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금융공기업은 신이 부러워할 직장이 아니라 신이 나서서 고쳐야 할 직장이었다. '신의 직장…금융공기업의 진실과 허상'을 시리즈를 통해 짚어본다.
#1.금융공기업 부장인 K씨(48)는 최근 지방 근무를 자원했다. 연내에 있을지 모르는 임원인사 때문이다. K씨는 지방에서 2∼3년 근무 후 서울 본사로 복귀한다는 미래 계획을 세웠다.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K씨는 회사 내에서 임원 승진 유력인물로 꼽혀왔다. 그는 승진으로 일찍 회사를 그만두는 것보다 좀 더 오래 직장을 다니고 싶어했다.
#2.금융공기업 상무인 A씨(53)는 최근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A씨는 임원 임기가 1년여 정도 남아 있었기에 사내 후배들에게 충격을 던져줬다. A씨는 “금융 공기업 조직 시스템에 회의를 느꼈고 임원 직함은 허울이었다”고 중도사퇴의 변을 남겼다.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금융공기업. 직장인들이 부러워하는 금융공기업이 흔들리고 있다.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공운법)에 묶여 임금이 깎인 것은 둘째다. 임원 승진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됐고 조직을 위해 일하는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
일부에선 금융공기업이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대접받는 조직문화는 찾아 보기 힘들다. ‘가늘고 길게 가는 사람이 이긴다’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제발 임원만은….” 승진 꺼리는 금융공기업
최근 금융공기업 직원들은 임원 승진을 꺼린다. 임기와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금융공기업 임원은 2년 임기에 1년씩 연임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임은 전체 임원 가운데 통상 1∼2명에 그친다. 대부분 임기 2년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임원 승진과 함께 2∼3년 안에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셈이다. 정년 58세를 감안하면 50세에 임원이 될 경우 52∼53세에는 퇴임하게 된다. 말 그대로 ‘시한부 인생’인 것이다.
여기에 승진 메리트도 뚝 떨어졌다. 올해 들어 일자리나누기(잡셰어링) 동참과 경제상황을 고려한 임금삭감이나 급여 반납이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의 경우 등기임원 전원이 기존 연봉의 20%가 깎였고 부서장도 5%를 깎았다. 한국예탁결제원은 지난해 10월 임원 임금의 31.5%를 삭감한 바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호봉이 많은 팀장급이나 일반직원이 부서장보다 많은 연봉을 받기도 한다. 연차가 높은 부서장은 임원보다 더 많은 연봉을 챙기는 경우도 생긴다. 금융공기업 직원들이 임원 승진에 목맬 이유가 없는 셈이다.
■열심히 일한자, 떠나라
금융공기업 임원은 ‘찬밥’ 신세라는 말도 나온다. 위, 아래 눈치를 보는 것은 물론 노동조합도 의식해야 하는 위치가 공기업 임원들이다. 열심히 일해도 3년 이상을 버티기 힘든 게 임원이다.
그렇다고 퇴임 후 정해진 자리도 없다. 남는 것은 조직을 위해 희생했다는 자부심 하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허울 뿐인 임원 위상에 대한 자조 섞인 인식이 퍼지면서 민간기업처럼 임원 승진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조직의 경쟁력은 물론 발전을 떨어뜨린다.
금융공기업의 한 임원은 “공공기관 임원의 경우 정부의 평가에 따라 자리보전 여부가 정해지고 여러 곳의 눈치도 봐야 한다”면서 “문제는 후배들이 이런 상황에서 임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증권유관기관 관계자는 “부서장급은 임원이 될까 두려워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사리거나 최대한 성과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할 정도”라며 “이러한 조직 시스템의 문제가 기관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기업, 민간기업 절대 이길 수 없는 이유
금융공기업은 민간기업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임금이 깎인 것은 둘째다. 임원 승진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됐고 조직을 위해 일하는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 금융공기업이 ‘무사 안일주의’에 빠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대접받는 조직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늘고 길게 가는 사람이 이긴다’는 신조어도 나왔다. 공기업에 다니다 민간기업에 자리를 잡은 한 인사는 “공기업이 민간기업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걸 느꼈다”면서 “공기업 인사시스템 개편 등 조직 활력을 위한 전반적인 손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거래소의 한 부장도 동의했다. 그는 “금융공기업 임원의 경우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에 따라 상급기관의 감사와 감독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다”며 “잘나갈수록 일찍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을 반길 직원이 있겠냐”고 반문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에 대한 의욕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남들과 경쟁을 통해 조직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럼 민간기업은 어떨까.
국내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퇴직할 경우 퇴직금과는 별도로 퇴직 후에도 1∼2년 정도 회사 고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1억원 이상의 연봉을 유지해 준다. 대기업 직원 조모씨는 “명예나 연봉 외에도 임원 직급에 합당한 혜택이 주어지고 퇴직 후 다른 기업 고문이나 임원으로 옮기기도 쉽다. 당연히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고 누구에게나 목표가 된다”면서 “임원이 되더라도 성과에 따라 2년마다 연임이 결정되기 때문에 임원들의 노력과 경쟁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sdpark@fnnews.com 박승덕 이세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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