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오프라 팰리스와 오시리스가 손절매 지시를 거부한 것은 그것이 충성심에서 비롯됐다 해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옵션 가격이 극적으로 반등하더라도 반드시 추궁하겠다고 필립은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충성심과 우정을 빙자해 버릇하다 횡령이나 더 나쁜 범죄로까지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필립은 회의테이블에 붙박인 듯이 앉아 HTS를 지켜보았다.
“내 지시를 씹었습니다, 두 분?”
오프라 팰리스와 오시리스가 좌우에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이….”
“졸라!”
필립이 소리를 빽 지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포지션 청산하고 나서 봅시다.”
건너편에 앉은 노이만이 안타까운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필립은 졸라, 하고 한 번 더 욕을 해주고는 차트를 바라보았다.
차트는 오후 3시15분8초까지 거래기록을 보여주고 있었다. 10초, 20초 단위로 거래가 체결된 상황을 보여주었는데 오시리스가 투자한 콜옵션의 경우 장 마지막에 체결된 거래가 4200계약이나 됐다. 주문 물량을 모아 한꺼번에 처리하는 장 마지막에 체결된 계약 수는 많아야 2000계약 정도였다. 만기가 10거래일이 남아 있지만 폭락장에서 이처럼 매수세가 강한 것은 내일 장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옵션 행사가격 기준가격에서 외가격까지 하나씩 클릭해 보니 역시 콜옵션 매수세가 여느 날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런 날치고 다음날 제대로 오르는 거 못 봤습니다. 낼 아침에 모두 청산하십시오.”
“아침 승부는 보게 해줘야지. 여기서 놓치면 영영 기회가 없어.”
오시리스는 눈을 부릅뜨고 그렇게 대들었다.
“내 말을 또 씹는다는 겁니까? 무조건 청산하십시오.”
고마운 충성심이었으나 지금은 응석이었다. 그 충성이 너무 과격하여 보스인 필립을 비롯해 모두가 다치고 돈을 잃을 것이 뻔했다. 성공보수를 약속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격한 충성심과 자존심으로 일을 망칠 수 있어서였다.
“일단 10시 반까지만 지켜봐 줘요.”
오프라 팰리스가 살짝 몸을 기대며 말했다. 생글생글 웃음기가 묻은 말투였으나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보스의 소중한 돈을 잃은 참담함과 꾸중을 들은 서러움을 온몸으로 삭이면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필립은 자책하는 심정으로 테이블을 꽝, 내리치고는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골프연습을 해볼까 했으나 온몸이 물에 젖은 듯 무력해서 몇 블록 건너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필립은 냉장고를 열고 냉기를 쐬었다.
몸이 좀 식자 소파에 앉아 캔 맥주를 마시면서 지난 일을 떠올렸다. 무일푼으로 시작했던 일이었다. KDS그룹 창업주 회장의 외도 파트너였던 어머니를 욕되게 하면서 친자확인소송을 하겠다고 덤비던 때 어쨌던가. 자신이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 벌었던 돈을 옵션 투자로 많이 잃었지만 그는 아직 가진 것이 많았다. 돈도 있고 팀원들이 돕고 있었다. 게다가 대신제강 안형모 회장이 그를 후견하고 있었다.
그래 힘을 내자. 마신 캔을 힘주어 꼬깃꼬깃 구겨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린 필립은 옷을 훌훌 벗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업무일지를 온라인에서 결재하고 메일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투자 결과를 온라인 업무일지를 통해 다시 확인해 보니 역시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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