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원교수의 뮤지컬,영화에 빠지다] 빌리 엘리어트,콧등 시큰한 감동

박지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10.29 16:30

수정 2009.10.29 16:30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무용수를 꿈꾸는 탄광촌 소년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수작이다.

외국에 가면 무슨 작품을 보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뉴욕으로 떠나는 회사 출장길에 혹은 휴가차 떠난 런던 여행길에 뮤지컬 한편 볼 시간이 남는데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싶다는 설명이다. 공연에 대한 감상이야 개개인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어서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말 건네기 어렵지만 추천해도 거의 원망을 듣지 않게 되는 ‘보험’같은 뮤지컬 작품이 있다. 최근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표구하기 어렵다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다.

코믹한 상황 전개에 박장대소하다 어린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에 눈물 훔치게 되는 것이 묘미인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바로 그 영국 영화를 무대용 뮤지컬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영화가 제작된 지난 2000년으로 ‘네 번의 결혼식 한 번의 장례식’, ‘풀 몬티’,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과 더불어 21세기 영국 영화의 붐을 일으킨 대표적인 히트작으로 손꼽힌다. 약 500만달러(약 60억원)의 제작비를 쓰고 거의 2200만달러(약 264억원)를 벌어들여 4배가 넘는 수익을 달성했는데 이 마저도 파생상품의 부가가치는 제외한 수치이니 현대 사회에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흥행 영상물이 지닐 수 있는 경제적 파급력을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뮤지컬로 만들어진 ‘빌리 엘리어트’는 요즘 공연가의 최신 트렌드인 무비컬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다. 처음 이 영화가 극장용 뮤지컬로 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많은 마니아들은 일찍부터 큰 관심을 보였는데 두말할 나위 없이 원작 영화 자체가 음악과 춤이라는 요소에서 성공적인 무대화에 대한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으로 환생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지난 2005년 5월 11일 런던의 빅토리아 팔레스 극장에서 처음 막을 올렸고 이후 브로드웨이는 물론 호주 시드니나 멜버른에서도 공연이 시작되는 등 지금까지 초대박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뮤지컬로 제작된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스티븐 달드리가 연출을 맡았고 영국의 내로라하는 싱어송라이터인 엘튼 존의 작곡을 더해 완성시켰다.

원작이었던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사회적 리얼리즘이 가미된 성장영화다. 사회적 리얼리즘이란 코믹한 설정이나 흥미로운 이야기 안에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적인 고민을 담아 풍자해내는 일련의 경향을 말한다. 배꼽 잡는 드라마와 코믹한 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은 입가를 맴도는 알싸한 뒷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이런 성향의 작품들이 지니는 묘미다. 공장이 문을 닫아 갈 곳이 없어진 노동자 계급의 남성들이 이제는 경제력을 지니게 된 여성들 앞에서 알몸이 되어 스트립쇼를 하는 ‘풀 몬티’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만하다. 늘씬한 근육에 능숙한 춤사위가 아니라 아랫배 나온 중년의 몸매에 어설픈 몸동작을 얹은 출연자들의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연민을 자아낸다.

▲ 영화에서 주인공 빌리 역을 맡은 제이미 벨이 뮤지컬 무대에도 서기를 기대하는 팬들이 많았지만 그의 캐스팅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뮤지컬로 만들어진 ‘빌리 엘리어트’도 마찬가지다. 상업 무대로서는 드물게 뮤지컬 안에 사회적 리얼리즘을 반영한 이 작품은 무노동 무임금을 주창하며 영국병을 치료했다는 대처 정권의 또 다른 단면을 시골 탄부의 가정에 맞춰 풍자하고 있다. 왕립발레아카데미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워 달려간 노조 사무실에서 사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된 마지막 파업이 절묘하게 교차된다든지, 아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동료를 배신하고 파업 현장을 떠나 굳은 표정으로 탄광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뒷모습 등은 객석에 무거운 정적을 드리울 정도로 깊은 무게감을 완성해낸다. 화려하거나 환상적이지도 또 결코 달콤하지도 않지만 콧등 시큰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서 만날 수 있는 씁쓰름한 사회풍자에도 비할 만하다.

또 다른 영화와의 공통점이라면 무대용 뮤지컬에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춤과 연기 보는 재미가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이다. 원작 자체가 워낙 인기를 누렸던 탓에 특히 주인공인 빌리 역은 오디션 때부터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부 영화팬들은 영화에서 등장했던 아역 배우 제이미 벨이 무대에서도 나오길 원했지만 열한 살이었던 영화 제작 때보다 지금은 청년으로 훌쩍 자라버린 터라 결국 성사되진 못했다. 대신 영국 전역에서 펼쳐진 오디션을 통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세 소년, 제임스 로마스와 조지 맥과이어 그리고 리암 모어가 트리플 캐스팅됐는데 겨우 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역동감 넘치는 캐릭터를 완벽히 묘사해내 영국 무대 최고의 영예인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의 남우주연상을 공동수상했다. 물론 역대 최연소 수상자들이다.

무비컬 ‘빌리 엘리어트’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대서양 건너 시작된 브로드웨이 공연도 지난 6월 토니상을 휩쓰는 파란을 연출했고 주인공 꼬마들의 남우주연상 수상 신드롬도 고스란히 재연됐다.

한국어 공연도 올려질 예정인데 요즘엔 빌리가 강원도 사투리를 써야한다는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의 고집 때문에 우리 제작사 측이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어련히 알아서 잘 만들겠지만 이왕이면 알싸한 사회적 리얼리즘의 묘미를 잘 살린 라이선스 뮤지컬로 완성됐으면 좋겠다.
내년 여름 막을 올릴 한국의 빌리는 얼마나 많은 관객을 울리고 웃길까. 행복한 궁금증에 겨울나기가 벌써부터 지루한 요즘이다.

/순천향대 교수·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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