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어두운 브로드웨이 시장.. 빛난 ‘★들의 행진’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11.08 18:13

수정 2009.11.08 18:13

▲ 다니엘 크레이그(왼쪽), 휴 잭맨 주연의 '스테디 레인'
뉴욕의 찬바람도 가을 햇살과 더불어 야무지게 영글어가던 지난달 말, 뉴욕타임즈에 흥미로운 칼럼이 하나 실렸다. 지난 봄 시즌에 비해 눈에 띄게 호황을 누리고 있는 브로드웨이 시장의 뚜껑을 열어보니 막상 손에 꼽히는 몇몇 작품들의 고공행진을 제외한다면 작품의 종류와 장르를 떠나 변함없이, 어쩌면 더 어두운 그늘이 브로드웨이 극장가 구석구석을 드리우고 있다는 우울한 이야기였다. 신(新) 예술의 역사를 자랑하는 공연 문화의 메카, 예술 애호가들과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뉴욕의 한복판 타임스퀘어에서 이게 무슨 어리둥절한 소식이란 말인가.

힘겨웠던 지난 시즌을 넘기고 올 가을로 접어들면서 브로드웨이는 조금씩 그러나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소식들을 알려왔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둘째 주 발표된 브로드웨이 리그(The Broadway League)의 집계에 의하면 드디어 브로드웨이 총수익이 2100만달러를 기록하면서 지난해 동기에 브로드웨이가 벌어들였던 1900만달러를 훌쩍 웃도는 숫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중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의 작품을 떼어놓고 본다면 실질적으로 그 외의 크고 작은 작품들과 극장들은 더욱 험난한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패트릭 힐리(뉴욕타임즈 공연 칼럼니스트)가 꺼내놓은 브로드웨이 속사정을 살펴보자.

패트릭 힐리는 이번 가을 브로드웨이의 안정적 상승세를 이끌며 든든한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선두주자로 ‘살육의 신’, ‘스테디 레인’ 그리고 ‘햄릿’ 이렇게 세 작품을 꼽았다. 세 작품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이름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대형 스타 연예인들을 간판 출연진으로 내걸고 있다는 것. 여성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탄성을 지를 법한 주드 로가 ‘햄릿’의 무대에 매일 오르고, 굳이 액션영화를 즐기는 영화팬이 아니더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다니엘 크레이그와 휴 잭맨이 ‘스테디 레인’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으며, 게다가 지난 시즌에 막을 올린 후 승승장구 중인 ‘살육의 신’에는 제프 다니엘스, 홉 데이비스, 제임스 갠돌피니, 마샤 게이 하든 등 너무나 낯익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있다. 급기야 ‘스테디 레인’과 ‘살육의 신’은 ‘위키드’, ‘라이온킹’, ‘저지보이즈’, ‘빌리 엘리어트’ 등이 자리잡고 있는 ‘100만달러 클럽’(매주 10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지속적으로 기록하는 작품들)에 가뿐하게 합류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에 반해 이 거대하고 찬란한 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많은 다른 작품들은 더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언제나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개의 작품이 막을 올리는 브로드웨이에서는 좋은 리뷰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현실이지만, 최근 이러한 흥행작 몇 편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올리아나’ ‘로열 패밀리’ ‘수페리어도넛’ 등)이 견뎌내야 하는 엄청난 빈부의 격차는 지난해 이맘 때보다 더욱 힘겨운 경쟁의 한복판으로 그들을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작품들만이 가진 초호화 캐스팅의 저력이 지난 봄에도 관객을 한 쪽으로만 과도하게 집중시키는 현상을 이끌어내면서 나머지 극장들은 텅 빈 객석과 허덕이는 재정난을 이겨내지 못한 바 있다. 그 결과 ‘정복자 노만’, ‘조 터너의 왕래’, ‘예뻐야 할 이유’ 등 여러 수작들이 일찌감치 뼈아픈 종연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볼 때, 이번 가을·겨울시즌도 ‘별’을 달고 있지 않은 작품들에게는 몹시 혹독한 시기가 될 것으로 짐작된다.

11월 말 첫 공연을 앞둔 흑인계 수퍼스타의 이야기 ‘펠라!’가 이미 잡혀있는 오프닝 날짜를 윌 스미스등 흑인계 유명 연예인들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 희극작가 닐 사이먼의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이 결국 첫 공연 후 1주일만인 지난 1일 막을 내리고 말았다는 소식은 브로드웨이와 연극·뮤지컬 공연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프리뷰 공연 이후 현저하게 낮은 예매율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오던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이 지난 20여년간 가장 잘 나가던 흥행 보증수표 작가였던 닐 사이먼의 대표작이라는 것과 그가 과거 퓰리쳐상, 토니상 등을 휩쓸었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오는 12월 그의 후속작인 ‘브로드웨이 바운드’ 또한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번 흥행 실패의 충격은 강도가 더욱 심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이 “‘햄릿’의 주드 로처럼 요즘 한참 잘 나가는 대형 스타가 캐스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평론가들의 평가였다.

나아가 패트릭 힐리는 더욱 우울한 문장으로 이번 칼럼을 끝맺고 있다. “조만간 막을 올리는 또다른 수십 편의 신선한 작품들은 이러한 거대한 별들의 후광 없이도 과연 브로드웨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한 스토리가 아닌가 싶다.
연기력과는 상관 없는 소위 ‘간판스타’를 내걸고 흥행에 목숨 거는 우리나라 엔터테인먼트계와 아주 닮은꼴이 아닌가. 수준 높은 관객의 안목과 예술을 지극히 사랑하는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 연극계도 결국은 이와 같은 법칙에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나는 이 유명 스타들의 연기력을 논란에 올리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그리고 개인적으로 직접 관람한 몇 개의 공연에서 그들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퍼져나오는 황금빛 아우라는 몸과 마음으로 임하는 그들의 열정적인 연기와 더불어 정말이지 감탄할만 했다). 다만 빛나는 간판을 내걸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미처 그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숨을 거두어야만 했던 여러 작품들에 대한 연민이 나를 사로잡았을 뿐이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수많은 뮤지컬 포스터와 전광판 광고들 속에서 문득 조승우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어, 저 공연 뭐지, 보러 갈까”하는 생각을 무심코 하는 것처럼, 실험적 공연과 무명의 예술가들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것으로 자부심 높은 뉴욕의 관객들도 결국은 브로드웨이닷컴의 헤드라인에 ‘제인 폰다 브로드웨이로 46년만의 컴백!’ 이라는 타이틀에 혹해 내용도 모르는 ‘33개의 변주곡’ 예매 버튼을 클릭하고 에단 호크라는 이름 하나에 평소엔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안톤 체홉의 ‘벚꽃 동산’ 표를 구하려고 종일 기다리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또 씁쓸하게도 이것이 동서를 막론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우리 인간들의 심리 아닐까.

/뉴욕=JESH.Project@gmail.com
■이 글을 쓴 JESH Project는 재이, 은수, 성원, 효 등 4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공연예술기획 프로젝트 팀으로 현재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