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1000회맞은 뮤지컬 ‘아이러브유’의 배우 김영주

박하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11.26 09:25

수정 2009.11.26 09:25


현실 속의 그는 보다 매혹적이었다. 172㎝의 큰 키와 숏팬츠는 더없이 잘 어울렸고 검은 빛의 뱅헤어는 강렬함을 더했다. 이런 겉모습 때문에 누구라도 그에게선 폭발하듯 뿜어내는 에너지를 기대한다.

선입견이 무너진 것은 얼마 후였다. 차분히 귀를 기울여야 들릴만큼 조용한 목소리와 한박자 느리게 대답하는 신중함. 사실 이런 것들은 배우 김영주(36)에게 기대한 바는 아니었다.

그의 무대 위 인생 스펙트럼은 꽤 넓다.
왕비(뮤지컬 ‘햄릿’)부터 몸을 파는 여인(뮤지컬 ‘라이프’,‘벽을 뚫는 남자’ 등)까지. 강렬하고 거친 인상 탓에 그가 맡은 역할은 언제나 극과 극이었다.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거리의 여자, 기생, 술집의 가수가 더 많긴 하지만.

되바라진 끼로 똘똘 뭉쳤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학창시절 그는 얌전한 A형의 기질을 그대로 지닌 모범생이었다. 유복하게 자란 셋째딸, 장차 미술 교사를 꿈꾼 그의 인생은 대학 입시 실패와 함께 180도 바뀌었다.

뮤지컬 배우에 도전한 것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한국예술신학대학 뮤지컬학과에 진학했고 1996년 뮤지컬 ‘명성황후’로 신고식을 치른 뒤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2000년경이다. 이 시기를 그는 ‘안하무인했고 오만했다’고 말한다. 두려울 것도, 꿀릴 것도 없던 때였다. 2001년 뮤지컬 ‘렌트’로 한국뮤지컬대상 신인상을 받은 것은 활활 타오르는 자신감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 이후로도 거의 매년 노미네이트는 됐던 거같아요. 후보에 오르면 일단 기대는 하게 되죠. 나이를 먹으면서 연연해하지 않게 됐지만 한동안은 실망도 컸고 욕심도 많이 부렸어요.”

그는 올해에도 뮤지컬 ‘42번가’로 어김없이 후보 명단에 올랐다. 촉망받는 신예들이 속속 등장한 요즘에도 많은 작품이 그를 찾는다. 꼭 무대 중앙이 아니어도 빈 곳을 채우고 매번 호평을 이끌어내는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팬이 많기로 유명한 그의 매력 포인트는 ‘예쁜 척 하지 않는 것’이다.

“2006년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에서 노파 역을 맡았을 때였어요. 수년간 배우를 해왔고 비슷한 역할도 했지만 예쁘게 보이고자 하는 본능을 버리기 쉽지 않더군요. 가장 고된 작업이었어요.”

말을 마친 그는 입을 주욱 내밀고 눈을 찡그렸다. 고운 화장으로 치장된 얼굴은 순식간에 팔순 노파가 됐다. 곧 ‘여배우 특유의 본능’을 버린 뒤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졌고 진실돼 졌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는 이 진리를 새 작품 ‘아이 러브 유’에 투영하고자 한다.
내달 4일부터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이 작품은 4명의 배우가 60개의 배역을 맡아 사랑과 결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옴니버스 구성으로 보여준다.

필모그라피의 대부분을 거칠고 강한 역할로 장식한 그가 이런 류의 로맨틱 코미디 무대에 선 횟수는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
“미혼인데 어떻게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냐구요. 아니 그럼, 제가 언제는 왕비였거나 몸을 파는 여자였던 적이 있나요?” 조용한 목소리로 반박한 그는 이내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13년간 배우 생활을 하다보니 작품을 고르고 따지기 보다는 이번 작품을 통해 제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까를 고민하게 되요. 그간 대형작품에 익숙해진 제 목소리와 역량을 아기자기한 소극장에 맞게 가꾸고 다듬는게 새로운 목표죠.”

/wild@fnnews.com박하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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