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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 탄생 100년 ‘호암을 기리다’] (3) “잘사는 조국”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1.17 16:23

수정 2010.01.17 16:23

▲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지난 1965년 어느 날 서울 장충동 자택 정원에서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던 중 잠시 사색에 잠겨 있다. 그는 '인류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업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사업보국의 신념을 일생의 과제로 삼았다.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길에 오른 19세의 청년 이병철은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평생 잊지 못할 수모를 겪었다. 배가 현해탄에 접어들면서 뱃멀미를 견디지 못한 이병철은 1등석으로 자리를 옮겨달라고 요청했으나 단지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거절당했다. 이병철에게 처음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당시 상황을 호암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모든 것은 나라가 기본이다. 나라가 강해야 한다. 강해지려면 우선 풍족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풍족하고 강한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 후에 내가 오직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식민지 지배하에 놓인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게 했던, 그 배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 경제의 ‘거목’ 호암 이병철은 50여년간 삼성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37개의 기업을 설립·인수했다.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를 설립한 뒤 1987년 타계할 때까지 호암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란 3가지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해 삼성뿐 아니라 한국 기업사에 이정표를 제시했다.

■사업을 일으켜 국가에 보답한다

호암은 기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 나아가 인류에 공헌하고 봉사하겠다는 ‘사업보국’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참다운 기업인은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기업을 발전시키고 국부 형성에 이바지해야 한다”며 사업보국의 경영이념을 평생 실천했다.

이 같은 호암의 철학은 1953년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의 설립으로 구체화됐다. 호암은 그 전까지 삼성물산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자본금 3억원으로 시작한 무역업이 1년 만에 17배의 수익을 안겨줬다. 호암은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제조업 진출을 결심했던 것이다.

호암의 ‘제조업 진출 선언’에 대해 당시의 중역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공장을 설립하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들고 회수기간도 오래 걸린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전쟁 직후 값싼 원조물자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국산품이 팔리겠냐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호암의 제조업 진출 결심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의 사업보국이란 경영철학 때문이었다.

후일 호암은 제조업 진출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 대해 “국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비물자를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다가는 언제까지나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국민이 소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사업보국이란 경영철학은 이후에 더 크고 커다란 결과물로 나타났다. 1969년 삼성전자와 1974년 삼성중공업 등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소비재에 이어 국가 기간산업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특히 1977년에는 회사 안팎의 비관적인 여론을 물리치고 반도체산업에 진출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당시 호암을 곁에서 모셨던 정준명씨(전 삼성 회장비서실 비서팀장)는 한 월간지 기고문을 통해 “회장께서는 당시 생소한 반도체의 개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로부터 조언을 받았으며 그런 와중에도 어떤 종류의 반도체가 유망할지를 간파하셨다”며 “호암과 당시 이건희 부회장의 결단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삼성이 오늘날의 기적을 일굴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인재 발굴은 기업가의 사명이다

호암의 또 다른 경영철학은 ‘인재제일’이다. 호암은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하는 데 썼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는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인다”며 평생 인재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삼성 출신 임직원들이 국내 산업계를 주름잡고 있으며 ‘삼성맨’이란 자부심을 갖는 것도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삼성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철저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호암은 “기업은 사람”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국내 최초로 1957년 사원 공개채용제도를 도입,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기업 연수원을 설립했다.

호암은 인재를 중시한 만큼 사람에 대한 신뢰도 컸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 피란길에 올라 대구에서 양조장을 위탁경영하던 이창업, 김재초 등에게 양조장 수익금으로 3억원을 받았던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받았던 3억원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재기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던 것이다.

호암은 ‘의인물용, 용인물의’란 말도 자주 썼다. 사람을 의심하면 쓰지 말고,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명심보감을 기업 경영에 실천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호암이 면접을 볼 때 관상쟁이를 앉혀놓고 본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1972년부터 1982년까지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에서 근무했던 손병두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은 한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비서실에 있던 10년간 관상쟁이를 앉혀놓고 면접을 보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21세기에도 빛나는 합리추구 경영

호암은 어릴 적 서당에 다니면서 유교를 배우다가 신식 학문도 접하면서 동서양의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호암의 3대 경영철학 가운데 합리추구는 동서양 학문이 융합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간다는 동양사상에, 사리에 맞게 합리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서양사상이 융합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리에 맞게 회사를 경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나 이론적으로는 합리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합리적인 경영을 하는 경영자는 21세기 들어서도 흔치 않다.

호암은 과거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영비결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일단 (사원이) 입사하면 영원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공정한 승진 기회를 주고 적재적소에 배치해 정당한 보수를 주었다. (중략) 나는 공정한 인사원칙에 어긋남이 없도록 노력했다. 이것이 나의 확고한 경영방침이다. 이 밖에는 경영에 비결이 따로 없는 줄 안다.

이 같은 합리추구는 삼성이 국내 기업 가운데 어느 회사보다 먼저 전사적자원관리(ERP)를 비롯한 첨단 정보시스템을 도입한 데서도 나타난다. 일본 소니의 한 관계자는 “삼성이 소니의 TV를 앞지를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잇는 ERP와 공급망관리시스템 덕분이었다”고 털어놨다.

호암은 이미 몇십년 전에 합리추구의 구현물이 정보시스템이란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yhj@fnnews.com 윤휘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