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볼커 룰/곽인찬 논설실장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2.02 16:42

수정 2010.02.02 16:42

카터 글래스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미국의 47대 재무장관을 지낸 미국 상원의 중진의원이었다. 그는 1913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탄생의 주역이기도 하다. 금융 전문가인 그에게 대공황은 충격이었다. 그는 대공황의 원인 중 하나를 은행의 잡탕 영업에서 찾았다. 은행이 상업·투자은행 업무를 겸하다 보니 한쪽에서 발생한 리스크가 은행 전체를 뒤흔든다고 본 것이다. 그는 둘 사이에 칸막이를 둬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마침 하원 은행·통화위원장인 헨리 스티걸 의원도 같은 생각이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1933년 은행법(Banking Act)을 성사시켰다. 이 법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따 흔히 글래스-스티걸법으로 불린다. 이 때부터 미국에선 상업·투자은행 영역이 엄격히 분리됐다. 골드만삭스·리먼브라더스 등은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은행으로 컸고 씨티·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은 안정적인 상업은행의 선두주자로 성장했다.

두 세대가 흐르자 대공황의 교훈은 기억 속에서 흐려졌다. 월가의 시장근본주의자들은 규제완화 바람에 편승해 칸막이 규제를 풀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의회는 공화당의 주도 아래 1999년 글래스-스티걸법을 폐지했다. 신바람이 난 월가의 ‘살찐 고양이들’(Fat Cats)은 방종에 빠졌다. 잡탕 영업이 부활했고 신용도가 낮은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채권에도 함부로 손을 댔다. 해마다 월가에선 흥청망청 보너스 잔치가 벌어졌다.

무한탐욕이 화를 부른다는 건 만고의 진리다. 글래스-스티걸법이 폐지된 지 9년 만에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다. 월가는 대마불사의 보호막 뒤로 몸을 숨긴 채 긴급 공적자금 수혈로 간신히 살아났다. 그러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살찐 고양이들이 다시 보너스 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에 오바마 대통령은 노발대발, 잔칫상을 뒤엎었다. 그는 온 미국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약 이 친구들이 싸움(Fight)을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싸울 것”이라고 공언했다. 대통령 바로 옆에는 거구의 폴 볼커 전 FRB 의장이 서 있었다.

오바마는 새로 발표한 금융규제안을 ‘볼커 룰’(Volcker Rule)이라고 불렀다. 볼커가 카터·레이건 두 대통령 아래서 8년 간 미국 중앙은행을 이끄는 동안 그에겐 ‘인플레이션 파이터’라는 별명이 붙었다. 연방기금 금리는 한때 최고 20%까지 치솟았다. 시장은 아우성이었다. 정치인들도 깐깐한 볼커를 좋아하지 않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는 “볼커가 FRB 의장에서 물러난 것은 레이건 행정부가 그를 규제완화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말했다. 그렇게 무대 뒤켠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볼커의 재등장은 월가에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볼커는 글래스-스티걸법의 부활을 선호한다. 그의 아바타인 오바마 대통령은 은행이 자기자본으로 위험한 투자를 일삼거나 헤지·사모펀드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같은 룰을 지키려면 결국 투자은행을 분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볼커와 오바마는 앞으로 고객 예금과 상관없는 투자은행은 망하든 흥하든 정부가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공적자금을 꿀꺽 삼켰다가 공공의 적이 된 월가는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오바마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대공황이 글래스-스티걸법을 낳았다면 금융위기는 볼커 룰을 낳았다. 미국에선 볼커 룰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월가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무절제한 탐욕을 응징하는 쪽으로 흐를 것 같다. 베를린 장벽(Berlin Wall) 붕괴는 사회주의의 종말인 동시에 오만한 자본주의의 시초였다.
그로부터 20년 뒤 자본주의의 꽃이라던 월 스트리트(Wall Street)가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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