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 키코문제,시장논리만으론 안돼/차상근 산업2부장

차상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2.11 17:21

수정 2010.02.11 17:21

은행이 수출 중소기업들에 판매한 외환 헤지 통화옵션 상품인 키코(KIKO)가 말썽이다.

키코는 'Knock In, Knock Out'의 줄인 말이다. 말 그대로 환율의 일정범위를 지정해 환율이 이 범위 내에 있을 경우 시장가보다 높은 지정환율로 외화를 팔 수 있는 통화옵션이다. 즉 환율의 변화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기업들이 금융기관과 맺는 계약이다. 환율이 일정범위를 벗어나더라도 지정범위 아래로 내려가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환율이 지정범위 위로 올라가면(Knock-In barrier) 기업은 계약한 금액의 시장가보다 싼 가격에 많은 외화를 팔아야 하기 때문에 심각한 손실을 입는다.


이 같은 KIKO 판매의 적정성 여부를 두고 벌어진 수산중공업과 우리·씨티은행 간 본안소송 첫 판결에서 법원이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 첫판이 예상대로 골리앗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일 것 같다.

현재 키코계약의 불공정성을 주장하며 소송을 진행 중인 업체가 100여곳을 넘고 있다. 금액도 4조원대로 추산되고 있다. 일부 재판에는 기업과 은행이 각기 노벨상 수상자 등 국제적 유력 인사를 증인으로 내세워 석학들 간 대리전을 벌일 정도로 '밀리면 끝장'식의 혈전을 벌이고 있다.

법원의 첫 판결이 나오자 키코 피해 기업들은 은행의 관련 임직원을 사기혐의로 형사고발하겠다고 나섰다. 민사뿐만 아니라 형사소송까지 추진함에 따라 키코 사태의 결말은 무작정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됐다. 소송 기간이 길어지고 복잡해지면 기업들의 경영은 꼬일 수밖에 없다.

지난 2007년 본격 출시된 이 상품은 당시에는 보기드문 환리스크 관리 상품으로 외환관리에 문외한인 수출중소기업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향 안정 추세였던 환율이 이명박정부 출범에 맞춰 급등하면서 키코계약을 맺은 기업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문제는 손실을 보는 기업들의 면면이다.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를 적정 관리할 필요성이 있을 정도로 알토란 같은 회사들인데 환율 변동으로 도산의 위기까지 처한 것이다.

피해 기업들은 상품판매 과정의 불완전성 문제를 소송으로 풀어보려고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성토 대상이 한 군데 더 있다고 말한다. 그 대상은 은행이 아닌 현 정부다. 키코로 인한 손실 발생의 가장 큰 이유가 고환율 정책 탓이라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몇년간 달러 약세상황이 지속됐는데 환율이 그렇게 급반등할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않았다." "당시 새 정부가 수출경쟁력 등을 거론하면서 환율 상승을 유도했는데 애꿎은 알짜배기 중소기업들만 그 덤터기를 쓴 격이다." 며칠 전에 만난 대구의 한 섬유업체 사장의 하소연이 생생하다.

골리앗을 상대로 한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면 이미 엄청난 환차손 피해를 입은 관련 업체들의 체력은 쉽게 고갈될 것이다. 이미 연매출 6000억원대 태산엘시디 등 몇몇 우량 기업들은 수백억원대 손실을 못견디고 법원의 회생 절차를 밟고 있다.

유망 수출업체들이 줄도산할 경우 국가경제에 미치는 파장은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정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명확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정부가 정책적 판단 아래 고환율 상황을 유도했다면 그 정책의 후유증으로 생긴 피해자에 대한 배려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환율 정책으로 생기는 이득을 대기업들이 거의 독식하는 반면 중소기업들은 강 건너 불 구경한 사례를 몇 차례 봐왔다.
키코 사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고환율 정책에 중소기업들이 되레 피해를 본 사례다.

국가가 키코 사태를 은행과 기업간 송사쯤으로 치부하고 법원의 판결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키코 사태에 걸린 중견, 중소 수출업체들은 늙어가고 있는 한국 경제의 새 피이자 활력소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csky@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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