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차기 한은 총재의 조건/곽인찬 논설실장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2.16 16:49

수정 2010.02.16 16:49

싫든 좋든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닮은 게 하나 있다. 집권 중 나랏빚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불가피했다고? 맞다. 전대미문의 금융위기를 극복하느라 빚을 내서라도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복지에 돈을 쏟아부은 노무현 정부와는 빚의 질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나랏빚이 늘었다는 결론은 같다.


재정적자는 수렁이란 표현이 잘 어울린다. 미국은 진작에 이 수렁에 빠졌고 일본은 이 수렁 속에서 ‘잃어버린 20년’을 보내고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국가들도 수렁에 발을 담갔다. 선진 각국의 지도자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재정적자의 위험성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이들이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긴축이 곧 정치적 자해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태도도 미덥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정부는 아직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바로 참여정부가 같은 논리를 폈다. 결과는? 노무현 정부 초기 21% 수준이던 국가채무 비율은 작년 말 35%대로 높아졌다. 고령화와 베이비 붐 세대의 은퇴 등을 고려할 때 재정적자가 돌아킬 수 없는 선을 넘어선 것은 아닌지 두렵다.

지금은 국민이 나랏빚 증가를 용인하는 분위기다. 재정 지출 덕에 일시적이나마 일자리가 생기고 경기가 살아났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위기는 짧고 재정적자는 길다. 장차 이 대통령은 위기를 극복했다는 칭송을 듣겠지만 동시에 재정적자를 늘렸다는 비판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당장은 위기 관리 공적이 돋보이지만 5년, 10년 뒤엔 어떻게 평가가 달라질지 모른다. 서울시장 시절 예산 절감에 앞장섰던 이 대통령이 적자를 늘린 대통령으로 기억된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아직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라는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여기엔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짧게 보면 6월 지방선거, 길게 보면 내후년 대선도 출구전략 곧 긴축의 장애물이다. 이런 저런 핑계 속에 인기 없는 긴축은 차일피일 미뤄지기 십상이다.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선 안 된다. 재정 건전성은 한국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극복한 저력도 재정의 건전성이 바탕이 됐다. 기초 체력이 튼튼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앞서 위기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외변수에 취약한 우리 경제의 특성상 탄탄한 재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긴축과 출구전략을 말하기 곤란하다면 여기 대안이 있다. 차기 한국은행 총재에 꼿꼿한 소신파를 앉히면 된다. 이성태 현 총재의 임기는 오는 3월 말 끝난다. 4년 임기의 한은 총재는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도 필요 없으니 대통령이 임명하면 그뿐이다. 소신파 총재는 대통령 마음대로 휘어잡을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위기 이후 재정규율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완수하는 데는 깐깐한 총재가 제격이다. 대통령·정부·정치권에 맞서 긴축의 총대를 멜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중앙은행 총재다. 비선출직이라 유권자 눈치 볼 것도 없고 오로지 중장기적 안목에서 국가경제만 염두에 두면 된다. 대통령은 한은 총재의 소신을 긴축의 적당한 핑곗거리로 삼으면 된다.

최악은 총재 자리에 자기편 예스맨을 앉히는 것이다. 정부와 정책 공조를 넘어 찰떡 궁합을 과시하는 총재는 나라빚을 줄이는 데 별 도움이 못 된다. 시장에 금리 인심을 쓰는 인물도 총재감이 아니다. 언론엔 차기 총재 후보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어딜 봐도 이성태 현 총재는 쏙 빠져 있다. 그러나 한은법을 보면 총재는 한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이성태 카드도 법적으론 여전히 유효하단 얘기다. 재미삼아 상상해 보자. ‘이성태 연임’ 헤드라인에 시장과 국민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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