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현장르포] 부산·김해 와이어로프 공장..“원산지 증명은 유럽수출 보증수표”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6.14 23:06

수정 2010.06.14 23:06

자유무역협정(FTA)이 확대되면서 '원산지 증명'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불법 우회수출을 막기 위한 원산지 증명은 한·유럽연합(EU), 한·미 간 무역통상의 핵심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한·미 FTA가 체결되면 미국은 우리나라 기업에 대해 원산지 조사를 직접 하게 된다. 우리 수출업체들이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간 면세 받은 관세환급은 물론 과징금까지 물어야 한다. 신뢰를 잃게 돼 수출길도 끊기고 자칫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

철저한 대비가 시급하지만 기업들은 뭘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해야 할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도 뒤늦게 기업들의 원산지증명 대응시스템, 설명회 등을 열면서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고 있다. 이재일 딜로이트안진 국제통상서비스센터장은 "FTA가 확대되면 원산지 관련 분쟁은 최대 이슈가 될 것"이라며 "국가적 차원에서 수출 역량을 유지하기 위해 '원산지 증명' 이슈를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7개월에 걸친 EU 당국의 원산지 증명 조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부산의 와이어로프 업체들을 현장취재했다.

"'원산지 증명' 문제가 해결되면서 공장도 증설하고 수출 주문도 늘었어요. 이제야 일할 맛이 나네요. '원산지 증명'에 대한 보장을 확실히 받은 결과죠."

지난 11일 경남 김해 안하농공단지에서 만난 보성선재의 김선국 사장은 요즘 힘이 난다. 회사가 수출하는 와이어로프(강선을 여러 가닥으로 꼬아서 강도를 높인 철선)가 한국산 원료로 만든 제품이라는 것을 수출대상국가인 EU 당국으로부터 인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건설·산업용 와이어로프를 생산, 전량 유럽에 수출하는 중소기업이다.

■"인증 못받으면 수출 못한다니…"

한달 전만 해도 김 사장은 걱정으로 잠을 뒤척인 날이 많았다. EU집행위원회의 '원산지 증명' 실사 때문이었다.

김 사장이 '와이어로프 원산지를 조사하겠다'는 EU의 사전 질의서를 받은 것은 지난해 8월 12일. '원산지 증명을 못하면 수출할 수 없다'는 얘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간도 촉박했다. 40일 이내에 답변서를 보내야 했다.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이 파트너가 돼줬다. 전담 회계사는 회사 담당직원과 한달여간 공장에서 숙식하며 답변서를 준비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지난해 10월 27일, 보성선재 공장에 EU집행위원회 소속 조사관 두 명이 찾아왔다. 며칠 동안 강도 높은 조사가 이어졌다. 조사관은 4년 전의 영수증, 납품증명서 등 원산지 관련 자료까지 낱낱이 조사했다. 이 조사에 대응한 최현 회계사(딜로이트안진 국제통상서비스센터)는 "원산지 증명 실사는 질문도 까다롭고 준비해야 할 자료도 방대하다"며 "사전에 준비해 놓지 않았다면 대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했다.

■EU의 강도 높은 '원산지증명' 실사

EU의 와이어로프 원산지 조사는 빙산의 일각이다. 모든 산업·제품이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원산지 조사는 우회수출 업체를 찾아내기 위한 것. 값싼 중국산을 가져와 한국산으로 속여 유럽에 수출하는 불법 업체들을 적발하기 위한 것이다.

원재료 가격이 치솟으면서 일부 업체들은 중국 제품을 포장만 바꿔서 한국산으로 둔갑해 수출, 돈을 챙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EU가 중국산 와이어로프에 부과한 60.4%의 반덤핑 관세를 피하기 위한 편법인 셈.

유럽 수입국들은 한국산이라고 수입한 와이어로프가 도금이 잘 벗겨지고 녹이 스는 등 품질이 형편없자 우회수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다만 물증이 없을 뿐이었다. 지난 2007년 EU집행위는 한국 세관에 원산지 조사를 요청했고 한국세관은 5개월여간 조사를 벌였지만 솜방망이 처벌로 일단락지었다. 하지만 암암리에 우회수출이 계속되자 결국 EU집행위는 한국 업체에 직접 실사까지 하게 된 것. 우리나라는 EU의 와이어로프 최대 수출국이다.

EU집행위는 지난해 10월 보성선재를 시작으로 한 달여간 청우제강, 쌍용선재 등 한국 와이어로프 업체 14곳을 정밀 실사했다. 조사단이 돌아간 지 6개월 만인 지난달 11일 EU집행국은 11개 업체의 원산지를 인증, 관세 면제를 확정했다. 하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1개 업체는 파산했고 2개 업체는 거짓 자료를 제출하고 조사를 거부했다.

하성욱 딜로이트안진 회계사는 "과거엔 EU가 원산지증명 예비판정이 날 때까지 한국산으로 인증해줬는데 이번엔 확정 통보가 나기 전까지 관세 면세액을 예치해 놓을 정도로 강경한 입장이었다"고 했다.

■'한국산' 인정 받자 유럽 바이어들 줄 서

보성선재 김 사장을 만난 그날 오후에 찾아간 쌍용선재도 와이어로프 생산라인 확장에 분주했다. 부산 녹산공단에 있는 이 회사는 자동차용 와이어로프를 생산, 국내외 유명 자동차 부품사에 공급하는 알짜 기업이다. 세계 자동차 경기가 호황이라 풀가동해도 수출물량 대기가 힘들 정도다. 장석천 쌍용선재 상무는 "그동안 한달에 2500∼3000t 물량(와이어로프)이 우회수출로 나가는 바람에 수출가격이 오르지 않아 고생했다"며 "하지만 원산지 증명이 확정돼 업체가 정리되면서 유럽 바이어들이 줄을 서고 있다"고 했다. 바로 옆 청우제강도 생산라인 확장에 바빴다. 와이어로프 도금은 물론 다양한 사이즈의 와이어로프를 생산, 올해 5000만달러 이상 수출을 기대하는 강소기업이다.
이날 만난 박인환 청우제강 부사장은 "원산지 증명으로 품질과 가격에서 한국업체가 주도권을 잡게 됐다"며 "다시 시장에 활기가 넘치고 있다"고 했다.

/skjung@fnnews.com정상균기자

■사진설명=지난해 11월부터 개시된 EU집행위원회 원산지 현지조사에서 청우제강은 생산된 와이어로프에 대해 지난달 '한국산'으로 최종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반덤핑관세 면제 혜택을 받아 유럽에 수출하고 있다. 부산 녹산공단의 와이어로프 생산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