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이석주 “시계와 말을 버리고 낡은책과 여인을 잡았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6.17 08:21

수정 2010.06.17 02:58

▲ 5년만에 개인전을 여는 서양화가 이석주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인물을 들고 나왔다. 낡은책과 명화속 여인을 차용한 이번 작품 역시 ‘시간과 세월’의 잔해를 찾고 있다.

구겨진 하얀시트위엔 뜨거운 키스로 멈춰있는 연인의 사진이 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허공엔 스르르 꽃잎이 날리고 사진뒤 시계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에로틱함도 잠시, 열정적인 사랑도 화려한 꽃잎처럼 언젠가는 떨어지고 시간의 흐름앞에선 시들고 마는 인생이라는 의미가 살아난다.



그의 작품앞에선 그저 망연해진다. 화면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림일 뿐인데 알 수없는 허무함과 고독이 우수수 따라온다.

서양화가 이석주(58·숙명여대 교수)의 작품은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넘나든다.

지난 16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5년만에 개인전을 여는 작가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곱슬머리에 고개를 모로 틀고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은 작가의 모습은 ‘어린 왕자’ 같았다. 장미꽃을 별에 남겨두고와 늘 궁금한 표정의 어린왕자처럼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동그란 눈동자를 크게 뜨고 이야기를 했다. 적막하고 쓸쓸함이 감도는 그림때문일까. 작가는 웬지 슬프고 외로워보였다.

이번 전시에는 ‘이석주 그림’하면 떠오르는 ‘말과 시계 기차’는 빠져있다. 낡은 책과 양귀비 꽃, 명화속 여인을 데리고 왔다.“변화를 주고 싶은 욕심에 개인전이 늦어졌다”는 그는 “시계와 말을 자주 그리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며 “그동안 소재를 바꾸는데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세월과 떠남,시간’을 말과 시계로 상징적으로 그려왔다면, 화면에 담은 책과 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아름다운 세계에 도달하고픈 열망을 심었다. 대상은 변했지만 일관된 주제는 ‘흐르는 시간’ 그대로다.

소재를 돌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서 삶에 대한 감성과 또 다른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는 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정말 아름답고, 풀을 봐도 새롭고 하늘도 더 푸르게 느껴지더군요. 우리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해서인지 그 대상들이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고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주태석 고영훈 지석철 작가와 함께 국내 70년대 ‘홍대 극사실화풍 4인방’으로 유명하다. 추상회화가 득세했던 당시 작가는 “왜 보이는대로 그리면 안되냐”며 선배교수들에 대항하며 국내 현대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제낀 장본인이다. 이들은 모두 대학교수가 됐다.

국내 극사실화의 대표작가로 꼽히는 그는 하지만 “극사실화는 내게 작품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적인 주제일뿐 깊은 의미가 아니다”고 했다.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이 감정을 차단시키고 기계적인 매커니즘을 강조한 반면 자신의 그림은 개인의 정서나 느낌을 전달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거대하게 확대된 너덜너덜해진 책과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 겉장이 뜯어진 오래된 책 앞엔 꽃잎이 떨어져 날아간다. 엉뚱한 결합, 광활한 하늘속 배경에 담긴 화면의 이미지들은 서로 만나면서 초현실적인 ‘데페이즈망’이 된다.

▲ 사유적공간/8-20.130x72.8cm/2008

“제가 화면에 그리고 싶은 것은 시간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하늘은 무한한 느낌을 주면서 상상을 만들어내지요. 명화 속 인물의 배경이 하늘이 됐을 때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서정적 풍경이 여전한 작품속 분위기는 대상만 바뀌었을뿐 ‘이석주표’의 처연한 느낌은 그대로다. 더욱 진득해졌다고나 할까.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신비적 공간은 작품 기법에도 숨어있다. 에어브러쉬를 사용한 매끈한 화면은 아크릴 물감위에 끈적끈적한 유화를 덧발라 더 단단해지고 깊어졌다. 거친듯 하면서도 단단하게 구축된 밑칠위에 섬세하고도 감각적으로 마술처럼 뿜어지는 입자들의 이미지들은 사진도 구현해내기 어려운 미묘한 디테일들을 잡아낸 손맛을 보여준다.

“시각이냐 내용이냐를 놓고 갈등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림에선 일단 시각이 먼저지요. 내용은 동기를 부여해주는 거니까요. 스토리위주의 의미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책은 오래된 문명의 시계이고, 꽃은 유한한 생명의 아름다운 순간을 상징합니다. 베르메르의 소녀는 순수함이 있는 같아서 차용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베르메르의 터번을 두른 소녀나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는 작품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향수케 하는 존재로 강하게 다가온다. 오래된 책과 명화속 여인은 시간의 잔해를 찾아나선다. 기억의 앙금을 다독이며 짙은 향수를 내뿜는 작품앞에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인생앞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 것 같았는데 자신 또한 욕망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작품 제목 ‘사유적 공간’을 화두로 삼고 있는 작가는 1981년 그림자가 강렬했던 극사실 ‘벽’ 작품으로 화단의 이목을 받았다. 이후 캔버스에 거대한 시계를 비롯해 질주하는 기관차, 망연한 눈빛의 말, 두둥 떠 있는 나뭇잎 등의 작품을 선보이며 30여년간 극사실화를 놓지않고 있다. 사진같이 매끈하면서도 ‘인간의 감정이 묻어나는’ 그림으로 호평받는 작품은 국내는 물론 동경 시카고 독일 북경 스페인등 해외아트페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어릴적에 형들은 가난이 싫어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막내인 저는 만화를 잘 그려 그림만 그렸어요. 아버지는 너는 공부보다는 그쪽이 나은 것 같다며 그림을 그리라고 했죠.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작가는 연극인 이해랑(1916∼1989)의 아들로 자녀 중 유일하게 예술가 기질을 물려받았다. 두 형들은 모두 기업가로 성장했다. 큰형은 한국주택협회 회장과 현대산업개발 부회장을 지낸 이방주 이해랑연극재단 이사장이고, 둘째형은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에이티넘파트너스의 이민주 회장이다.

227×181.8cm(700호) 대작과 100호이상 극사실화 신작 20여점에 시간과 세월, 작가의 인생 풍경을 담아낸 이번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진다.(02)734-0458

/hyun@fnews.com박현주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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