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은 올해 설립된 지 111년이 됐다. 우리은행의 역사는 곧 '한국 금융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19세기엔 민족은행으로서 일제 36년 강점기 땐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1960년대 이후 고성장기엔 삼성, LG 등 한국을 대표하는 초일류 기업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해왔다. 21세기 들어선 글로벌 은행을 향해 착실하게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우리은행 행장 역임
우리은행은 지난 1899년 1월 30일 대한제국의 황실자본과 조선상인이 중심이 돼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대한천일은행'의 의미는 '하늘 아래 첫째 가는 은행'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족은행과 주식회사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로 조선엔 의미가 컸다. 고종황제는 황실 자금인 내탕금을 자본금으로 납입했다. 정부 관료와 조선상인들도 다수 주주로 참여해 주주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대한천일은행의 창립이념은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이라고 돼 있다.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격인 탁지부 대신에게 '대한천일은행'이 제출했던 창립청원서에 나와 있는 말이다. '돈을 원활하게 융통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근본'이란 의미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구한 말 당시로선 금융에 대한 획기적인 패러다임"이었다고 말했다.
또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없다'고 규정해 당시 일본 등 외세로부터 민족자본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대한천일은행은 최초 지점을 1899년 5월 10일 인천에 개점했다. 같은 해 5월 23일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개성에도 지점을 열었다.
당시 은행 운영은 전통상인들이 중심으로 맡았다. 민족금융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정부 관료들도 참여했다. 대한천일은행 초대 은행장이었던 민병석은 탁지부대신, 궁내부대신을 역임한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지난 1902년 제2대 은행장으로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취임했다. 영친왕은 대한천일은행이 일반은행의 역할뿐만 아니라 중앙은행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또 민족은행으로서 경제자립을 통해 국가 위기를 막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국채보상운동 모금 앞장,민족 은행으로 우뚝
지난 1905년엔 일제에 저항해 휴업을 단행하는 등 민족운동에도 앞장섰다. 1907년부터 일본에 진 나랏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 그 예다. 대한천일은행은 이 운동으로 모은 자금을 관리했는데 특히 독립자금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되면서 조선총독부는 '대한천일은행'이라는 명칭을 '조선상업은행'으로 강제로 변경시켰다. 민족은행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
때문에 당시 민족적 정서는 대한천일은행을 중심으로 일제에 강하게 항거하기 시작했다. 지난 1919년 3·1운동 때에는 대한천일은행 본점 앞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1930년대에는 황해도 해주, 평안도 정주 등에서 지점 유치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우리은행의 또 다른 줄기는 '한일은행'의 전신인 '조선신탁주식회사'와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로 이어진다. 이들 은행들은 이후 한국 금융의 큰 축을 담당했다. 지난 1932년 설립된 조선신탁은 부동산, 유가증권, 금전 신탁자금 운영전문 금융회사로 기업 금융을 담당했다. 1936년 설립된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는 서민 금융 또는 소기업 금융을 주로 담당했다. 두 회사는 광복 후 '한국흥업은행'으로 하나가 되었고 1960년 '한일은행'으로 재탄생했다.

■국내 '맏형'은행 역할
이후 한국전쟁으로 우리은행은 이북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50개 영업점(상업은행 27개, 신탁은행 8개, 상공은행 15개)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 경제 재건 과정에선 국내 은행사에 '획을 긋는' 성과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여성만을 위한 은행 영업점인 '숙녀금고'가 개설되기도 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이것이 당시 외신에 주목을 받아 전쟁 후 변화하는 우리나라 은행의 커다란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후 1956년 3월 3일엔 증권거래소가 개설되면서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상장 1호 기업이 됐다. 1962년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우리은행은 전국민의 저축증대 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사회간접자본 및 중화학공업을 위한 정책금융을 담당해 온 우리은행은 삼성, LG, 포스코 등 대기업의 주거래은행을 담당해 기업 금융의 동반자 역할을 해왔다.
지난 1968년도 11월 11일에는 시중은행 최초 해외점포인 일본 도쿄지점을 개설한 바 있다. 또 1982년 2월 12일 국내 최초 온라인 현금지급기를 설치했다. 지난 1989년 국내 최초로 삼성전자와 펌뱅킹(기업과 은행간 전용선 기반의 자금거래 시스템)을 가동했다. 외환위기 이후엔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한빛은행'으로 합쳐져 현재의 우리은행이 됐다.
/powerzanic@fnnews.com안대규기자·도움말=우리은행 은행사 박물관
*직원들이 말하는 장수비결은?
우리은행 직원들은 우리은행의 최대 강점으로 '강인한 정신력'과 '우수한 인력'을 꼽는다.
111년의 우리은행 역사 속에서 한국 금융산업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산전수전을 겪어왔기 때문에 어느 조직보다 '긍정의 유전인자(DNA)'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위기속에 피어난 꽃'
111년 장수 기업의 비결은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외환위기(IMF), 구조조정 등 수많은 역경을 이겨냈고 성공적인 인수합병(M&A) 등을 거치면서 직원들 내부에선 어떤 환경이 닥쳐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고 밝혔다. 우리은행을 '위기 속에 피어난 꽃'으로 비유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우리은행 직원들에게 가장 가슴벅찬 순간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국내 최고 은행으로 탈바꿈한 2000년대 초다. 우리은행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이덕훈 은행장 시절 우리은행은 위기에서 탈출해 국내 선두 은행으로 거듭났다.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사기, M&A에 따른 한일은행과 상업은행 출신간 갈등, 저조한 영업실적 등으로 어두웠던 우리은행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당시 '백두대간'이라는 프로젝트 아래 8000여명 직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릴레이 산행을 한 것이 커다란 영향을 준 것 같다"며 "전 직원이 최고의 은행이 되기 위해 혼연일체가 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우리은행은 지리산에서 설악산, 그리고 백두산까지 28개 구간 총 1000㎞의 릴레이 산행을 진행하며 전 임직원이 '우리나라 최고 은행'으로의 각오를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2004년 국내 최고 수준의 경영진, 직원들의 자발적 혁신, 긍정의 DNA 등으로 우리은행은 '기적의 역사'를 쓴다. 지난 1999년 2조원에 달한 영업손실은 2004년 1조45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영업이익으로 탈바꿈했다. 같은 기간 1조9800억원 당기순손실에서 1조9600억원 당기순이익으로 전환됐다. 당시 행장을 맡았던 이덕훈 서강대 교수는 "임직원들의 피와 땀으로 거둔 성과"라며 "은행간 경쟁에서 리더가 될 수 있는 강한 자신감과 체질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고객 가슴속 1등 은행돼야"
"고객은 우리은행 존재의 근간이자, 지속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앞으로도 고객과 함께 하는 새로운 111년의 역사를 만들어 가겠다."
지난달 이종휘 우리은행장은 우리은행과 20년 이상 거래해온 고객 27명을 초청해 가진 행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종휘 우리은행장은 '토종 우리은행' 출신으로 '우리은행 DNA' 소유자다. 금융위기 이후 정도영업을 강조하며 '고객 행복'을 은행 최우선 가치로 삼아 장기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종휘 행장은 우리미소금융재단 설립을 통한 서민금융 지원으로 향후 5년간 500억원을 출연할 예정이다. 또 미래금융 선도 차원에선 은행 내 비대면채널 확대를 위해 신사업발굴팀 역할을 하는 'U뱅킹사업단'을 구성했다. 중국, 남미 등 이머징 국가에선 타 은행 대비 두각을 나타내는 실적을 보여 글로벌 경쟁력도 커지고 있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