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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각가 고 송영수(1930∼1970)는 1950년대말 한국 조각계에 생소했던 용접 철조각을 과감히 시도하여 추상철조의 영역을 개척한 <한국 추상철조각>의 선구자로 꼽힌다. |
천재는 요절과 숙명일까. 나이 마흔의 그는 불꽃같은 작품과 열정을 고스란히 남긴채 순식간에 떠났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앞두고 정부로부터 추풍령에 세울 기념탑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추상조각으로 기념탑을 만든다니…. 서울∼부산까지 고속도로 준공탑 제작은 너무나 기쁘고 기쁜일이었다. 흥분상태, 작품에 몰두했다.
‘한국 추상철 조각 선구자’ 송영수(1930∼1970·오세훈 서울시장의 장인).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1950년대 말부터 한국 조각계에 낯설던 용접 철 조각과 동 조각을 시도해 ‘추상 철조’의 영역을 개척하며 한국 현대조각사에 ‘추상철조각’이라는 굵은 획 하나를 그었다. 부러질듯 가늘고 긴 팔다리, 앙상한 뼈같은 작품은 오히려 강건한 사유와 서늘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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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이 부러진채 긴목을 축 늘어트리고 입벌린 이 새는 1969년작 ‘새’는 제 18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출품한 마지막 작품이다. 드로잉 스케치에는 이 새를 두고 ‘싸우다 죽은 새’라고 메모가 남겨있다. |
■‘용접조각의 대가’ 송영수
해방과 전쟁의 혼란기를 거친후 국내 미술대학을 통해 배출된 1세대 조각가다. 해방이후 1950년 서울대 조각과에 입학한 송영수는 한국추상조각의 개척자였던 스승 김종영(1915∼1982)의 영향속에 자신만의 독자한 조각형식의 완성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지금은 흔하게 보이는 그의 용접조각은 당시로선 낯설고 파격적이었다. 6.25 전쟁 직후 한국 근대 조각은 서구 아카데미즘에 따라 석고를 이용해 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당시 미술대학의 커리큘럼도 두상과 흉상, 입상, 군상 등 인물조각 위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1950년대 중반부터 해외 조각계로부터 철과 용접이라는 새로운 재료와 기법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조각가라면 용접조각을 시도하지 않은 작가가 없을 정도로 당시에 철 용접조각은 선풍적인 유행이었다. 전후의 폐허속에서 석고 이외에는 적절한 조각재료가 없었던 그 시절의 조각가들에 고철이나 철판 자투리를 이용한 추상적인 용접조각은 핫(hot)아이템이었다. 젊은 조각가들은 새로운 표현방법에 자극받았고 서울대 미술대학에 다니던 송영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대학 3학년이던 1953년 여인 입상으로 국전에서 특선한 이후 4년간 특선을 하며 27세의 젊은 나이로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가 됐던 송영수는 1957년 국전에 그간 해왔던 것과는 다른 작품을 내놓았다.
당시 흔했던 철판 드럼통을 잘라 펴놓고서 작두로 자르고 용접하는 과정을 거친 ‘부재의 나무’와 ‘효’는 송영수의 최초의 용접조각이자 당시 국전을 통해 선보인 조각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이다. 당시 석고 인물상 일색이던 국전에서 흔치 않은 철조각품이었다.
선적 공간구조, 추상적인 철조각은 혁신이었다. 공공조형물로도 인기였다. 당시 195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목적의 기념조형물 제작이 붐을 일으켰고 196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송영수는 거의 해마다 진행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61년 육군 사관학교 교정에 세운 국기게양대를 시작으로 통일상(1964·육군사관학교) 통일상(1964.육균사관학교)성무대(1966·공군사관학교)등 그가 남긴 작품들은 공공조형물로는 드물게 추상적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당시 용접조각이 유행했지만 용접조각을 지속적으로 탐구한 조각가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송영수는 1957년 처음 용접조각을 제작한 이후로 작고할때까지 끊임없이 용접조각을 제작함으로써 용접조각의 대가가 됐다.이러한 선구적 활동은 젊은 조각가들이 다향한 표현가능성을 탐구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고 한국현대조각사의 층을 두텁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미술사가 김이순(홍익대 미술대학원 부교수)씨는 “우리나라 초기 용접조각가들이 주로 고철을 모아 입체구성을 하듯이 작품을 제작했던 것에 비해 송영수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면밀하게 계획한후 철판을 재단하여 용접하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흔히 즉흥적으로 제작했던 경유와 다르다”며 “그는 석고나 나무같이 양감을 살리는 재료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선적이고 날카로운 표현을 하거나 공간의 조형을 살리기 위해서 철 용접방식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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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판용접기법으로 제작된 ‘십자고상’(1964)은 철의 표면에 요철을 살린 극적인 효과로 예수의 육체의 고통과 고난의 모습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
■작고 40주기 기념 특별회고전
두드려 나온 요철, 가느다란 몸.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육체적 고통과 고난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지는 ‘십자고상’(1963)과 ‘순교자’(1967), 새(1969)는 용접조각의 기법적 숙련도와 표현의 완성도가 절정에 이른 대표적인 작품들로 평가받는다.
파헤쳐진 몸통의 내부, 부식된 동판들이 뜨거운 용접으로 얽혀있는 ‘순교자’는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감내하는 순교자의 심정이 강렬하게 표출되고 있다. 또한 반으로 꺾여버린 긴목, 앙상한 뼈를 지닌 ‘새’(1969)는 날카롭고 거칠게 펼친 날개, 울부짖는 형상을 한채’ 가슴을 울린다. 1969년 제 18회 국전에 마지막으로 출품된 이 작품은 일년후 영원히 날지 못하게된 작가의 마지막을 예건한 것처럼 비극적이다.
작가의 작고 40주기를 맞아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추상철조각의 선구자 송영수’전을 13일부터 열고 있다. 전후 피폐했던 한국 현대조각사에 조각가 송영수가 시도했던 용접추상조각에 대한 열정과 실험을 보여주는 회고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 3층 제5 전시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초기용접조각부터 작고 직전 시도했던 테라코타 작품까지 시기별 대표작들을 볼 수 있다.
짧았지만 불꽃같은 삶을 통해 영원히 빛나는 예술작품을 남긴 조각가 송영수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확인할수 있는 자리다.
직선도 수직도 없이 모두 휘어있고 완벽한 용접도 없는 작품에 대해 제자 강희덕 고려대 교수는 “볼륨의 한계를 넘어선 스승의 작품은 유연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나사가 빠지듯이 조금 헐겁게 제작해 차가운 쇠붙이를 부드럽고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대표 작품들과 함께 작가의 99권의 드로잉 북이 공개된다. 부인 사공정숙 여사는 송영수 작가에 대해 “예술을 위해 태어나시고, 예술에 모든 열정을 불사른 예술가”라고 회상하며 “늘 스케치북을 소지하고 다니셨다. 자다가도 일어나 스케치북에 스케치를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전시기간중 전시 설명회는 평일 오후 2시, 4시(주말 6시)에 진행된다. 전시는 12월 26일까지.관람료 3천원.(02)2188-6069h
/yun@fnnews.com 박현주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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