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드’ 팬이라면 지난해 최고 드라마로 ‘진’을 꼽는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4분기 TBS에서 방송된 ‘진’은 현대 외과의사인 미나카타 진이 에도 막부시대 말기로 타임슬립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흥미미진진한 전개와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각종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을 휩쓸었다. 그리고 내년 봄 시즌 2 방영이 결정됐다.
이 드라마의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는 오오사와 타카오(42). 한국에는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주인공 정도로 기억될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지금 뮤지컬에 출연해 화제가 되고 있다. 11월2∼22일 도쿄 아카사카 극장과 11월28일∼12월8일 오사카 우메다극장에서 공연되는 ‘팬텀’이다. 그리고 ‘팬텀’ 홍보물에는 빠짐없이 ‘오오사와 타카오의 최종장(最終章)’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번이 그의 마지막 뮤지컬 무대임을 알리고 있다.
그가 뮤지컬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역시 이 작품으로 2년 전인 2008년 출연했었다. 그런데, 당시 그는 안 하니만 못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중저음의 미성을 가진 그는 20대 말 정규앨범도 냈을 만큼 상당히 노래를 잘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3∼4분 짜리 가요를 노래하는 것과 3시간 가까이 연기와 노래를 동시에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오오사와 타카오의 팬이라고 해도 차마 ‘잘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첫 뮤지컬 무대를 망쳤다. 그리고 뼈아팠던 첫 뮤지컬 무대의 경험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그는 올해 ‘팬텀’ 재도전에 나섰다.
그런데, 여기서 ‘팬텀’이 어떤 작품인지 먼저 소개를 해야 할 것 같다. ‘팬텀’은 가스통 루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했지만 엄연히 다른 작품이다.
이 작품의 창작자는 뮤지컬 ‘나인’의 작곡가 모리 예스톤과 대본가 아더 코핏 콤비. 두 사람은 ‘나인’으로 토니상 작품상을 받은 이듬해인 1983년 연출가 겸 배우인 조프리 홀더로부터 ‘오페라의 유령’을 뮤지컬로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홀더는 루루 재단으로부터 이 작품을 미국에서 뮤지컬로 만들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러물을 뮤지컬로 만드는 것이 마음에 안든 예스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영국 극작가 겸 연출가인 켄 힐이 1976년에 자신이 만들었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리바이벌해서 약간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예스톤과 코핏은 본격적으로 작품 창작에 나서게 됐다. 힐의 ‘오페라의 유령’은 루루의 동명 소설을 처음으로 뮤지컬로 만들긴 했지만 베르디, 구노, 모차르트, 오펜바흐 등의 오페라 아리아에 영어 가사를 붙인 정도였다.
그러나 예스톤과 코핏은 정말 막강한 상대를 모르고 있었다. 바로 앤드류 로이드 웨버다. 웨버 역시 일찌감치 이 작품을 뮤지컬로 만드는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홀더 역시 루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 저작권이 만료되면서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간과했다.
예스톤이 ‘팬텀’의 대부분의 곡을 쓰고 홀더, 코핏과 함께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을 위한 펀딩에 나섰을 때 영국에서 웨버가 ‘오페라의 유령’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1986년 무대에 오른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바로 브로드웨이 진출이 결정됐다. 이에 따라 ‘팬텀’ 투자자들이 잇따라 중도 포기를 선언하는 바람에 예스톤 등은 공연 제작을 미루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후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을 본 코핏은 자신의 ‘팬텀’과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미국 방송사 NBC로부터 작품 요청이 들어오자 예스톤과 상의한 끝에 공연되지 못한 ‘팬텀’을 드라마로 만들어 NBC에 넘겼다. 1990년 방송된 이 드라마는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제목이 붙여졌고, 클래식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됐다.
누군가 이 드라마를 보면 뮤지컬 제작자로 나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두 사람의 바람은 진짜로 이뤄졌다. 1991년 텍사스주 휴스턴의 한 극장이 ‘팬텀’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비록 브로드웨이까지 입성하는데 실패했지만 이 작품은 미국과 유럽 등에서 1000회 이상 공연됐다.
오페레타에 가까운 뮤지컬 ‘팬텀’은 에릭(팬텀)의 젊은 시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보다 훨씬 원작을 많이 각색했다.
이야기는 19세기 후반 파리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아름다운 소녀 크리스틴이 노래하며 악보를 파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오페라 후원자인 샹동 백작은 크리스틴의 노래에 매료돼 오페라하우스에서 노래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준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극장에 왔을 때 샹동 백작이 소개해준 지배인 캐리에르는 해임되고 새 지배인 숄레가 취임하고 있었다. 캐리에르는 숄레에게 극장 지하 호숫가에 팬텀 즉 유령이 산다고 말하지만 숄레는 캐리에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리고 숄레의 아내이자 프리마돈다인 카를로타는 크리스틴의 미모와 재능을 질투해 그녀를 의상 담당으로 고용한다.
어느날 크리스틴의 노래를 들은 에릭은 그 청아한 목소리에서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은채 노래를 지도한다. 이후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콘테스트에서 크리스틴은 우승을 차지하고, 카를로타는 그에게 ‘요정 여왕’의 타이타니아 역할을 맡기도록 한다. 하지만 카를로타는 공연 첫날 크리스틴에게 약이 든 술잔을 내밀고, 크리스틴은 노래를 엉망으로 불러 관중의 야유를 받는다.
성난 팬텀은 크리스틴을 자신의 지하 은신처에 데려가는데, 이것은 그를 사람들 앞에 노출시키는 위험에 처하도록 한다. 크리스틴 역시 그의 흉측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침내 경찰이 지하에 도착해 그를 둘러싸고 총을 겨누는 순간 캐리에르가 다가와 그를 감싼다. 사실 캐리에르는 그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총소리와 함께 팬텀은 크리스틴을 부르며 사라지고 만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초연된 것은 2004년 다카라즈카에서다. 그리고 2006년 리바이벌됐던 이 작품은 다카라즈카의 자매 회사인 오사카 우메다 극장이 2008년 일반 뮤지컬로 다시 만들었다.
그렇다면 오오사와 타카오는 이번에 설욕에 성공했을까. 그의 출연 소식만으로 일찌감치 티켓이 매진된 이 작품은 흥행 면에서 확실히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는 성공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오사와 타카오는 2년 전에 비해선 확실히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말 드라마 ‘진’이 끝난 뒤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그는 이 작품을 앞두고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뛰어난 성량을 요구하는 팬텀 역에 제격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오사와 타카오의 팬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반 관객이라면 분명히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오오사와 타카오보다 크리스틴 역의 ‘안’이었다. ‘게이샤의 추억’ ‘인셉션’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종종 나오는 일본 국민배우 와타나베 켄의 딸인 안은 인기 모델 출신으로 최근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원래 이름은 와타나베 안이지만 아버지 후광이 부담스러워서 성을 빼고 이름만 예명으로 쓰고 있다. 뮤지컬 출연은 이번이 처음인데,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들 정도였다.
극중에서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팬텀을 비롯해 듣는 사람을 매료시킨다고 되어 있지만 안의 노래는 공연 내내 객석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극중에서 약이 든 음료수를 마시고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안의 노래를 듣지 않아도 되는 관객들이 오히려 마음을 놓았을 정도다.
오오사와 타카오의 설욕전으로 화제가 된 ‘팬텀’은 일본 뮤지컬계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스타 캐스팅의 명암을 여실히 보여주는 무대였다. 마케팅과 작품의 완성도를 놓고 일본의 뮤지컬 제작사 역시 스타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스타마케팅은 한국의 스타마케팅처럼 하나의 배역을 놓고 더블 캐스팅은 기본이고 트리플 혹은 쿼드러플 캐스팅까지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인기있는 연예인이더라도 뮤지컬 혹은 연극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이상 자신의 배역을 끝까지 혼자서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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