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합격한 것 축하한다. 고생 많았지. 대학 가면 뭐하고 싶어?”
“글쎄요......”
설날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 국가지대사라는 수능을 무사히 마치고 서울 모 대학 경영학과에 당당히 입성한 녀석이 자랑스러워 건넨 한 마디에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OT에 가면 술을 많이 먹는지,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처럼 사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만 되돌아 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장장 12년의 시간 동안 왜 대학에 가야되는지, 대학에 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사촌동생을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은 나 또한 비슷한 교육 과정을 거쳐 대학에 들어왔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서커스를 보면 흔히 커다란 코끼리가 아주 작은 말뚝에 매여서도 꼼짝 못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코끼리의 덩치에서 나오는 엄청난 힘이면 그 정도 말뚝이야 가볍게 뽑아버리고도 남을텐데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매여 있는 아기 코끼리의 모습은 학교에서의 학생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학생들은 아직 어리고 판단이 미성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가지 학교 규율로 인해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학생들은 틀에서 찍어내는 붕어빵이 아니다. 한창 나이의 아이들은 하고 싶은 일도, 꿈도, 생각도 각기 다양하다. 예컨대, 공부보다는 춤을 더 좋아하고 장래희망이 댄서인 학생이 있어도 이런 학교에서는 꿈을 펼칠 수 없다. 춤출 때 더 멋지게 보이게 하기 위해 염색을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야간 자율학습도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학교는 소위 ‘문제아’로 낙인찍고 ‘사랑의 매’로 다스린다. 학생들은 자연스레 그 통제 안에서 다양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줄에 매여 있게 된다.
중·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학생들은 비로소 비교적 ‘자유’로운 틀 안에서 ‘권리’라는 것을 누리게 된다. 자유로움 속에 두발도 마음대로 하고, 체벌도 받지 않지만 이미 그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잃어버렸으니 ‘책임’과 ‘창의성’이다. 규제를 받던 시절에는 걸리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예컨대, 학교에서 ‘담 넘기’를 금지하면 걸리지 않으면 될 뿐, 일단 성공하면 그에 따른 책임은 지지 않았다. 음지에서 반복되는 행동들은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해 가르칠 기회를 대개 주지 않게 되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유만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은 나몰라라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창의성’의 박탈이다. 자라는 내내 규율과 통제 속에 가두었던 학생들에게 왜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냐고 하는 것은, 늘 줄에 매어 있던 아기 코끼리에게 이제 컸으니 말뚝을 뽑으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개성을 뽐내고 싶고, 다른 하고 싶은 것도 많은 학생들에게 긴 시간 동안 기성세대가 원하는 ‘공부’ 잘하는 학생의 모습으로 살도록 규제해왔다. 한국이 세계에서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 결과는, 공부 말고는 딱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학생들의 모습을 잘 말해준다. 학창시절 춤을 추고 싶었던 학생은 어른이 돼서도 말뚝을 뽑지 못한 채 매어있는 어른 코끼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틀에 박히지 않은 새롭고 다양한 생각을 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humaned@fnnews.com 남형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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