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외국기업 벤치마킹 옛말..한국형 경영기법 찾아라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1.03.20 17:08

수정 2014.11.07 00:24

1990년대 중반 한국 굴지의 H그룹은 국내 최고의 전략경영컨설팅 전문가에게 그룹 전반에 대한 경영컨설팅을 맡겼다. 그리고 이 컨설팅 용역을 받은 국내 업체는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수백장에 달하는 컨설팅 결과물을 10여부 작성해 H그룹 회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H그룹 회장은 담당 부서에 이 보고서 폐기를 명령했다. 당시 H그룹 경영컨설팅에 참여했던 한 컨설턴트는 "보고서가 쓰레기통에 들어간 뒤 우연히 H그룹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보고서 폐기 이유를 물었더니 '외국 기업들 사례와 전략경영 방식만 있을 뿐이고 차별화된 색깔이 없어 쓸모 없다고 판단했다'는 말을 듣고 이후 컨설팅 작업 때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 당시에 한국기업들은 세계화를 외치며 해외 선진기업 벤치마킹을 위해 잘나가는 외국계 컨설팅서비스 수혈에 급급했다.

이어 외환위기가 터진 뒤 2000년대 초반에는 뼈를 깎는 기업 구조조정과 제너럴일렉트릭(GE), 애플, 도요타 등의 경영 시스템을 따라잡기 위해 외국계 컨설팅업체들의 표준화된 전략경영에 목을 맸다.

그러나 삼성, LG, 현대차, 두산, 롯데, SK 등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대기업들이 자체 생존 능력과 해법찾기 능력을 확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에 외국계 컨설팅업계도 한국의 시장 수준에 맞는 서비스와 조직 개편으로 발빠르게 대응하면서 '패러다임' 변화가 일고 있다.

■컨설팅 평가 깐깐해진 한국기업

이 같은 변화는 LG전자가 지난해 '컨설팅 결별'을 선언한 게 전환점이 됐다.

LG전자는 남용 부회장 시절 매년 300억원대의 컨설팅 비용을 지불했을 정도로 이른바 '컨설팅 경영'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대내외적으로 LG전자가 스마트폰 사업 진출 타이밍을 놓치는 과오를 범하는 등 시장 대응이 늦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급기야 지난해 새 사령탑을 맡은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이 '컨설팅과의 절교'를 선언하면서 LG만의 차별화된 글로벌 경영을 표방한 것이다.

공현배 리소시즈글로벌프로페셔널 한국지사 대표는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반열에 오르면서 과거 추상적인 경영 진단도 한물 갔다"면서 "컨설팅 업체들도 한국 상황에 맞는 독특한 방법론·기술·경험·통찰력 등이 결합된 컨설팅 서비스로 방향을 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SK, 두산, 웅진, STX 등 대기업들은 다국적 컨설팅사에서 근무하던 전 컨설턴트들과 국내외 경영학석사(MBA) 출신들을 대거 영입해 자체 컨설팅 부서를 신설, 상시 컨설팅체제로 전환했다. 더구나 글로벌 시장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어 차별성 없는 천편일률식 경영진단에 의존할 경우 시장 선점에 실패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1등 기업으로 자리를 확고히 다지면서 해당 부서나 해당 프로젝트별로 필요에 따라 자체적으로 전문화된 컨설팅을 받는 정도로 진화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부서나 프로젝트 별로 자신이 필요한 컨설팅에 대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산그룹은 컨설팅을 통해 그룹 구조조정 작업을 진행한 결과 오비맥주를 비롯한 식품 부문을 매각하고 밥캣 등을 인수하며 중공업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두산그룹은 맥킨지 출신 임원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로써 두산은 전문·특화된 사업에 대해 외부 컨설팅을 받는 것 외에는 자체적으로 경영전략을 구사할 자생력을 갖췄다.

효성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외부 컨설팅을 통해 9개 사업부를 3개 사업부로 축소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후 효성은 '선택과 집중'에 따라 ATM사업부와 타이어 소재 사업부, 스판덱스 사업부를 집중 육성해 그룹의 틀을 다졌다. 효성 관계자는 "외환위기 직후 컨설팅을 받은후 10년간 그룹이 고속성장하면서 추가로 외부 용역을 추진한 것은 없다"면서 "그룹 자체 역량이 커져 중요 사안에 대해 맞춤형 컨설팅을 받는 수준으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동부는 컨설팅에 의존하보다는 국내 대기업에서 검증된 임원급 전문가들을 스카우트해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있다.

■한국형 경영 컨설팅 시대 '활짝'

이처럼 한국 대기업들의 글로벌화가 확대되면서 '한국형 컨설팅'의 수요가 대세를 이룰 전망이다.

기존 외국의 글로벌 기업의 경영 형태를 따라가는 컨설팅이나 표준화된 컨설팅에서 벗어나 한국적 리더십 특성을 반영하면서도 경영 현장에서 실행 가능한 서비스 개발에 승부를 걸 시점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에 입성했던 외국계 컨설팅사 중 유럽계 컨설팅 방식은 한국에서 실패한 바 있다. 국내에서 시장에 진출했던 유럽계 컨설팅 기업으로는 프랑스계 캡재미니가 이미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고 영국계 언스트앤영도 한국시장에서 두번이나 철수한 뒤 이번에 다시 도전에 나선 상황이다.

컨설팅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의 컨설팅이 '성과주의'를 표방한다면 유럽식 컨설팅은 '방법론'에 가깝다"며 "한국기업들이 시장변화를 빨리 간파하고 속도전으로 움직이는 속성과 유럽식 컨설팅의 궁합은 잘 맞지 않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 시장을 주름잡았던 미국계 컨설팅 방식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과 일본 기업의 성공모델을 금과옥조로 삼은 채 미리 정해진 답에 '따라 오라는 식'의 진단으로는 글로벌 1등을 표방하는 한국기업들에 설득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김경준 딜로이트 사장은 "대기업 중심의 한국 컨설팅 시장에서 중견기업과 중소기업들도 글로벌 성장이 기대되면서 컨설팅 시장 규모도 커질 것"이라며 "대기업에 필요한 미래성장동력과 신시장 공략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중장기 성장 잠재력을 담아내기를 원하는 중견기업의 기대를 반영하는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조창원 팀장 김성환 강두순 유현희 홍창기 강재웅 이병철 유영호 이유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