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1월은 자연의 모습과 사람의 모습을 가장 닮은 시기인 듯하다. 산과 들은 낙엽을 자신의 뿌리 위에 덮어 다시 꽃 피기를 준비하고 울긋불긋 아름답게 한다. 사람들도 한 해를 정리하며 내년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달라질 그날을 생각하며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준비는 아름답지 않은 듯 하다. 특히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졸업과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의 표정에는 무거운 고뇌가 깔려 있다.이른바 '스펙'은 토익·토플·텝스 등 외국어 능력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을 기본으로 토익은 최소 850점 이상, 토플은 99점 이상, 텝스는 700점 이상은 최소한 만들어야 입사지원서를 낼 수 있다고 한다. 고득점일수록 영어를 잘한다고 평가해주고 입사에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엔 영어면접을 대비해 토익스피킹이나 국제공인영어회화평가(OPIC)까지 해놔야 안정적이라고 하니 영어스펙에 대한 그들의 준비는 가히 눈물겹다. 그러나 이 '스펙'을 갖춘 학생들에게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세트 메뉴를 바이어의 기호에 맞게 주문해보라고 시키면 9명 중 1∼2명 정도만 유창하게 주문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이 몸담고 있는 벌리츠 어학원에는 1대 1 레슨부터 기업의 위탁 강의까지 많은 직장인이 영어를 비롯해 글로벌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스킬까지 다양한 외국어 관련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이들의 외국어 스펙도 입사 당시에는 상당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어학원에서 만나는 그들은 한결같이 실무에 도움이 되는 현장 중심의 쓸모 있는 외국어 능력을 미리 갖추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숫자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스펙'의 '수치'만을 위한 외국어 공부에 대한 후회는 훗날 실전에 맞닥뜨렸을 때 얼굴 빨개지는 '수치'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국가적으로도 회화의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하고 독해 중심의 인증 시험들을 대체하는 시험(NEAT)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바야흐로 손이 아닌 입으로 먼저 깨우치는 회화 중심의 외국어 능력을 활용하고 평가받는 시대가 시작될 조짐이 보인다.
국내 취업은 물론 다국적 기업이나 외국과 교역하는 기업을 선호하는 학생들은 더욱 더 '수치'가 아닌 '실전가치' 중심의 외국어 능력을 철저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팀원간 문화 차이도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언어 학습이 돼 있어야 하며 개인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 양식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나라들의 가족 문화, 기업 문화 등에 대한 지식도 함께 배워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대인 관계 및 협업 능력을 함께 키워야 하는 것이다.
가치 있는 외국어 교육을 위해서는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의 모국어를 전부 배제한 채 그 언어적인 환경에 최대한 노출될 수 있도록 집중도를 높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문화와 풍습 등을 함께 가르치고 문화적 충돌상황을 미리 연습하고 훈련하면서 언어를 배우게 하는 것이 외국어 습득에 있어 큰 시너지를 발휘한다.
얼마 전 대학입학시험이 끝났다. 이번에 시험을 치른 학생들도 곧 대학생이 되고 졸업과 취업을 맞게 될 것이다. 이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기 앞서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에 2∼3번 시험을 치르기 위해 위험하게 이동하는 진풍경에서 씁쓸함이 먼저 입안에 고인다. 이들도 별 수 없이 그들의 선배들처럼 취업을 위해 '수치'를 쫓는 고달픈 여정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후배들만큼은 글로벌 무대에서 부끄러움 없이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외국어 능력을 갖춘 당당한 인재들이 되어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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