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출총제와 ‘닥치고 탐욕’/곽인찬 논설실장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2.01.24 16:47

수정 2012.01.24 16:47

[곽인찬칼럼] 출총제와 ‘닥치고 탐욕’/곽인찬 논설실장

 출자총액제한제는 정권의 부침에 따라 오락가락했다. 처음 도입된 건 뜻밖에 전두환 대통령 때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양김(김영삼·김대중)이 이끄는 야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야당은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화는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덩달아 대기업들도 코너에 몰렸다. 재벌의 문어발 확장에 제동을 거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1986년 말 국회에서 통과됐고 이듬해 4월 실시된다. 전경련은 출총제가 "기업의 창의와 능률, 경영 의욕을 떨어뜨릴 것"이라며 재고를 요청했으나 소용없었다. 1987년 6·10 항쟁은 출총제에 못을 박았다.

 외환위기 때 출총제에 큰 변화가 왔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허용했다. 대신 국내 기업엔 출총제의 족쇄를 풀어 경영권 방어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임시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위기에서 벗어날 무렵인 2001년 4월 출총제를 부활한다.

 진보 정권을 이어받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초 출총제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한동안 참여정부와 재계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정부와 싸우기도 벅찬 판에 소버린·아이칸 등 헤지펀드들은 적대적 M&A 공세로 대기업들을 괴롭혔다.

 5년 단임 대통령제 아래서 집권 4년차는 정권의 힘이 빠지는 전환점이다.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정권은 이미 보수 한나라당으로 넘어간 듯한 분위기였다. 2007년 4월에 바뀐 공정거래법은 출총제 적용대상 그룹을 자산총액 6조원에서 10조원으로 올리고 그중에서도 삼성전자·현대차 등 자산 2조원 이상 중핵 계열사로 좁혔다. 동시에 계열사 출자한도는 순자산의 25%에서 40%로 높였다. 출총제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법 개정이 참여정부 때 이뤄진 것은 아이러니다.

 보수 이명박 정부는 이마저도 폐지했다. 당선 후 첫 방문지로 전경련을 택한 '비즈니스 프렌들리' 대통령으로선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집권 4년차를 맞아 출총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정치권에서 다시 흘러나오고 있다. 진보 야당이 주장하면 으레 그런가보다 할 텐데 선거를 앞둔 보수 한나라당 안에서도 심각한 논의가 오간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보완'을 거론했다. 지난해 말 여야 공조로 현 정권의 감세 공약을 뒤집더니 이번엔 출총제 폐지마저 무산시킬 모양이다. MB노믹스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선 것처럼 위태롭다.

 나는 머지않아 출총제가 부활한다는 데 한 표를 던지겠다. 세상 돌아가는 품새가 그렇다. 5년 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예언'은 곱씹을 만하다. 그때 그는 "출총제 완화가 자칫 대기업들에 대한 규율 공백 상태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통큰치킨'과 기업형슈퍼마켓(SSM),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에 일감 몰아주기도 모자라 빵집까지 대기업들이 손을 뻗치니 중소기업과 자잘한 영세업자들은 설 곳이 없게 됐다. 상위 100대 기업의 경제력 집중도가 2003년 42.5%에서 2010년 51.1%로 높아졌다는 통계 수치는 실감이 덜 난다. 그러나 재벌 2·3세들이 빵집까지 냈다는 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은 분노한다. 이때만큼은 청년 실업자들과 퇴직 베이버부머들이 하나가 된다.

 규율 공백은 타율 규제를 부른다. 출총제가 살아나면 투자가 줄고 투자가 줄면 일자리가 준다는 논리적 설명은 출총제를 부활시켜 탐욕을 '응징'해야 한다는 감성적 주장 앞에 맥없이 무너진다.

 미국 진보파를 대표하는 폴 크루그먼 교수(프린스턴대)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미국이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라고 한탄한다. 오늘날 미국은 부모의 지갑 두께가 자식의 인생을 결정하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진보 성향의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재벌 독식'을 개탄한다. 계층간 이동을 가로막는 단단한 장벽 앞에 서민들은 좌절한다.
부모 잘 만나 땅 짚고 헤엄치는 재벌 2·3세들의 '닥치고 탐욕'을 서민들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볼까. 출총제가 부활한다는 데 내가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