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기를 보세요." 지난해 11월 28일 주식워런트증권(ELW) 불공정거래 여부에 대한 첫 선고공판이 열린 날. 법정 내 눈과 귀는 재판장의 입이 아닌 한쪽 벽면에 설치된 스크린에 집중됐다. 재판장은 ELW의 개념 정의부터 관련법령, 실제 현장에서 구현되는 방식 등을 대학에서 강의하듯 하나 하나 짚어가며 쉽게 설명하려 애썼다.
이는 ELW 불공정거래 혐의로 12개 증권사가 기소된 사건에서 첫 1심 선고를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형두 부장판사)의 선고공판 모습이다. ELW에 대한 최초의 사법부 판단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당시 사건에서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선고를 프레젠테이션(PT)으로 진행, 관련 당사자 및 방청객의 이해를 배려하려는 모습이었다. 최근 영화 '부러진 화살'로 사법부 불신 논란이 깊어진 가운데 재판과정을 개선한 법원의 소통 노력도 재조명되고 있다.
■화면에 설명, 판결문 목차도
지난해 증권가를 뜨겁게 달궜던 ELW 불공정거래와 관련한 공판은 학술논문 발표대회를 방불케 했다. 기소한 검찰 측과 증권사 변호인 측의 날선 공방이 시작되자 판사는 피고 측에 ELW 주문 결제시스템에 대한 상세한 PT를 요구했다. 다음 회차 공판이 시작되자 당시 증권사에선 딱딱한 전문용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결제시스템과 해외 사례 등을 조목조목 예로 들며 무죄를 주장했다. 당시 공판은 증권 관계자뿐 아니라 학계, 연구원들에게까지 관심을 촉발시켜 자본시장연구원에서도 직접 공판을 참관하는 등 화제가 됐다. 당시 나온 판결문은 164쪽에 이른다. 양측 공방과 재판부 측 고민의 결과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결심공판에 참석했던 자본시장연구원의 정윤모 연구원은 "사실상 피고들에게 자유로운 변론을 허용, 마치 미국 재판을 보는 것 같았다"면서 "판결문도 방대한 데다 목차까지 달려 있어 향후 연구에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 대한 공판과정도 눈길을 끈다. 당시 공판과정에 참석했던 한 네티즌은 '곽노현 교육감 재판을 다녀와서'란 장문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증인, 피고가 묻고 답하는 동안 쌓인 회한이 다 나왔다"면서 "100분토론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재판부 사과…가족은 눈물
최근 서울고법 형사12부(최재형 부장판사)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연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모씨에 대한 재심사건 선고공판에서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시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데 대해 죄송하다. 피고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원이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고 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 10월에는 교도소에 수감된 사실을 모른 채 가족들의 실종신고를 통해 호적상 사망 상태로 처리된 피고인이 재판 과정에서 법원 배려로 16년 만에 사망자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법무법인 화우 전종민 변호사는 "과거 법원은 '하고 싶은 말을 서면으로 내라'고 한 뒤 이를 검토해서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재판 진행도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면서 "지금은 많은 재판부가 '경청하겠소'라는 자세로 많이 바뀌었고 심리 후 판결문도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작성하고 선고하려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ksh@fnnews.com 김성환 조상희 최순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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