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가비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2.03.12 17:34

수정 2012.03.12 17:34

[새영화] 가비



조선 의병들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총질을 해대던 이 남자. 자신이 끌고온 일본군은 산 아래 저만치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언덕 위로 말을 타고 유유히 등장한 남자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번진다. 영화의 반전은 이때부터다.

영화 '가비(사진)'는 조선의 황제 고종의 암살 미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커피를 '가비'라 불렀다.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신 게 언제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야사가 있을 뿐이다.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뜰 한쪽에다 '고요하게 내다보는 곳'이란 뜻의 화려한 회랑 건축물 '정관헌(靜觀軒)'을 지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셨던 건 역사적 사실이다. 영화는 이런 핵심 팩트 몇 가지에다 일리치, 따냐, 사다코 등 가공의 인물을 섞어 흥미를 유발시킨다.

러시아 변방에서 커피와 금괴를 훔치며 살아가던 조선인 일리치(주진모)와 따냐(김소연)는 같은 조선인 출신 사다코(유선)가 쳐놓은 덫에 걸려 일본의 고종(박희순) 암살계획, 일명 '가비 프로젝트'를 떠맡게 된다. 조선의 첫 바리스타로 러시아 공사관에 취직한 따냐는 고종의 커피에 독약을 타는 게 임무다. 일리치는 조선군을 무력화시키고 고종의 손발을 끊어놓는 일을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미션은 성공했을까. 역사적으로 고종이 독약 탄 커피를 마셔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결과는 아는 그대로다.

고종을 '아버지를 죽인 원수'쯤으로 알고 있던 따냐는 정작 고종을 대면한 뒤 마음에 동요가 인다. 그런 따냐를 지키기 위해 일리치는 보장된 미래를 접고 자신의 미션을 뒤집는다. 그의 장렬한 최후는 그 대가다. 영화는 고종 암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 한 남자의 질긴 사랑 이야기 쪽에 더 가깝다. 새로운 소재가 주는 호기심은 컸지만 전체적인 구성과 표현은 다소 헐겁다.

일리치 역 주진모와 고종 역 박희순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사랑에 목숨 건 남자' 전문 배우 주진모는 기대만큼 그 역을 해낸다.
박희순은 고종을 유약한 듯 보이지만 강인한 내면을 가진 인물로 매력있게 포장했다. 가장 큰 비중이랄 수 있는 따냐 역 김소연은 장면마다 근사한 스타일을 자랑했지만 정확한 발성 면에선 아쉬웠다.
조선 말 시대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품, 의상들이 볼만하다. '접속' '텔미썸딩'을 연출했던 장윤현 감독의 작품. 15일 개봉.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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