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벤게로프(38)는 활화산 같았다. 젊음과 패기로 한때 세계를 휘어잡은 러시아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이지만, 뜻밖의 부상으로 활을 놨던 그다. 7년여 공백기간 지휘로 눈을 돌렸다가 지난해부터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 국내선 1996년 첫 내한공연을 했고, 2010년과 지난해엔 지휘자로 무대에 섰다. 그리고 지난 1일 8년 만의 리사이틀로 한국 관객과 다시 만났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가 열리자 작은 거인은 저벅저벅 홀로 들어섰다. 꿈쩍 않는 자세로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을 켜기 시작했다. 손이 덜 풀린 듯했다. 기계적인 손놀림이 독일 병정 같은 인상도 줬다. 파르티타 세번째곡 사라방드를 지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놀라운 집중력이 흐름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바흐 기악의 정수로 꼽히는 마지막 샤콘에 이르자 무대 위 바이올린 단 하나의 악기가 객석을 통째로 울려내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배그 파피언의 반주로 함께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에선 절정의 테크닉으로 객석을 빨아들였다. 숨죽이며 그의 연주에 몰입하던 관객들은 그가 활을 내려놓는 순간, 환호성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무대 위 그는 또박또박 혼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봄과 여름 사이, 서울의 밤은 실내악에 흠뻑 취한다. '클래식계 봄의 전령사'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SSF)가 막을 올렸고 '전설의 실내합주단' 이 무지치는 창단 60주년 월드투어 일환으로 다음달 한국을 찾는다.
벤게로프의 리사이틀은 올해로 일곱번째인 SSF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난달 30일 개막, 오는 13일까지 서울 세종체임버홀, 예술의전당 IBK체임버홀, LG아트센터 등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축제의 올해 주제는 '신비의 소리'다. 국내외 60여명 아티스트가 바이올린 음악을 집중 조명한다. "신비의 소리란 바이올린이 내는 음색을 뜻합니다. 바이올린은 노래하는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흡사한 음을 냅니다. 바이올린이 악기 중의 악기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예술감독인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연세대 음대 교수의 말이다.
축제기간 개성 넘치는 테마가 수두룩하다. 바람을 등에 업은 관악기들과 함께하는 실내악 '강풍'(2일)에 이어 두 악기의 결투 무대 '대결'(3일), 인상파 화가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빚어낸 음악의 향연 '드뷔시 & 인상주의'(4일), 야나체크·스메타나·드보르자크 등 체코 3대 작곡가들을 불러내는 '나의 조국'(5일)이 차례로 열린다. 3중주·5중주·6중주의 오묘한 무대는 '셋은 복잡해'(8일), '다섯의 기쁨'(7일), '여섯의 변주'(11일)로 꾸며진다. 프랑스의 드뷔시, 브라질의 빌라 로보스, 체코의 드보르자크, 영국의 엘가 등 각국 대표 작곡가들을 모은 '국민작곡가'(9일), 바이올린곡을 주제로 한 '피들러'(10일), 비올라의 진가를 보여주는 'B & V'(12일)도 눈길을 끈다. 공연장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체임버홀. SSF로는 처음인 오전 11시 '마티네 콘서트'도 있다. 3일과 9일 두 차례 서울 이태원동 용산아트홀 소극장에서 열린다.
이탈리아 명문 산타체칠리아 음악원 졸업생 12명이 모여 1952년 창단한 '이 무지치'는 세계 최고 실내악단으로 손꼽혀왔다. 이 무지치는 이탈리아어로 '음악가들'을 의미한다. 바이올린 6명, 비올라 2명, 첼로 2명, 더블베이스 1명, 챔발로 1명 등 총 12명으로 구성된 현악합주단이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18세기 이탈리아 음악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음악가 비발디를 집중 조명했다. 비발디의 걸작을 처음으로 레코딩해 250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 비발디의 사계를 클래식 유명곡으로 만든 주인공이 이 무지치다.
다음달 한국 무대에선 젊은 악장 안토니오 안셀미가 이 악단을 이끈다. 보시의 골도니아니 간주곡을 비롯, 60주년 자축의 의미로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헌정곡도 들려준다. 창원대 김한기 교수가 헌정한 '아리랑'도 세계 초연한다. 2부에선 비발디 사계 전곡을 감상할 수 있다. 기타리스트 김세황과의 깜짝 협연 무대도 있다. 다음달 15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시작해 23일까지 국내 전국 투어를 펼친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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