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處暑) 지날 즈음엔 시인 김춘수와 '귀뚜라미 젖은 무릎'이 생각나다가 한글날이 다가오면 김치, 에스프레소, 아쿠아 칼데, 염다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15년 전 이탈리아 라벤나로 드라마 심사를 간 적이 있다. 이탈리아 반도 북동쪽 해변의 작고 오래된 시골 도시였다. 역사적으로는 의미심장한 곳이었다.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였고 서방과 동방이 만나는 위치라 동·서로마제국의 특징을 모두 품은 도시였다.
'프리 이탈리아(PRIX Italia)' 방송제는 세계 최고의 TV 페스티벌이다. 각국 심사위원이 함께 작품을 본 후 평을 하는데 엉성한 영어 실력으로 심사평을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먹는 일, 워낙 시골이다 보니 한국식당이 없었다. 이 참에 이탈리아 음식이나 실컷 먹자 하고 스파게티와 빵으로 버티는데 작심삼일 만에 뱃속에선 전쟁이 시작됐다.
커피도 문제였다. 장복(長服)해 중독된 아메리카노는 찾을 길 없고 옆을 보니 모든 코쟁이들은 네로 황제의 눈물 받는 통 같은 작은 잔으로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소위 에스프레소. 용기를 내어 도전해봤지만 쓸개즙마냥 써서 치를 떨 지경이었다.
'아쿠아 칼데'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이탈리아 말이다. 칼데=뜨거운, 아쿠아=물. 뜨거운 물을 큰 컵에 담아 에스프레소를 부어 휘휘 저어 마시니 숭늉 마신 듯 살 것 같았다. 하지만 1주일쯤 되니 그 처방도 무효였다. 속이 뒤집히고 짜증까지 나는데 누군가 걸리면 한방 치고 싶을 정도로 불쾌지수가 높아졌다.
김치를 구하면 만사 해결될 것 같아 한국 관광객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근처에 신곡(神曲)을 쓴 단테의 묘소가 있다길래 달려가니 정말 동양인 몇 사람이 보였다. 옆에 다가가니, 아! 한국말을 하신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먹다 남은 김치 좀?" "허, 오늘이 귀국 날이라 다 처리했는데요." 내 삶에 김치가 그렇게 중요하며 한식이 발효식이라 중독성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짜장면, 짬뽕이면 될 것 같아 좀 더 먼 동네로 중국집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짬뽕을 찾으니 세상에 짜장, 짬뽕 없는 중국집이 있는 줄 그때 알았다. 메뉴 그림 중에 볶음밥 비슷한 게 있어서 주문해 먹는데 느끼해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다시 그림을 보니 옥수수 수프가 있어 보이를 힘차게 불러 주문했다. 잠시 후 노란 수프가 나왔고 반가워 급하게 둘러 마셨다. 헉! 웬 왕소금으로 국을 끓였나. 아쿠아를 연발하며 인상을 쓰는데 녀석은 어깨만 으쓱이며 알아먹지를 못한다. 영어로 써주면 알리라. '솔티 투 솔티(salty, too salty·짜도 너무 짜다고)' 냅킨에 크게 적어주니 알긴 왜놈 똥을 알아, 녀석은 주방을 향해 셸라 셸라만 했다. 얼른 드는 생각에 한국에 사는 화교들도 한국말, 중국말만 유창했지 영어는 모르더라. 아, 입사 동기 중에 이탈리아어 전공한 친구가 있는데 배워 둘걸. 허나 궁즉통(窮則通), 생각 하나가 떠올라 큰소리로 외치니 녀석이 달려왔다. 나는 냅킨 위에 두 글자를 썼고 녀석은 박수를 치며 주방으로 달려갔고 잠시 후 새 수프가 배달됐다.
간이 딱 맞았다! 흐릿했던 정신까지 번쩍 돌아왔다. 그날 냅킨에 써준 글자는 두 글자 '염다(鹽多)'. 鹽(염)은 틀리게 써주었던 같다. 그즈음 한글날엔 '순우리말' '한글 전용' 같은 깃발들이 무섭게 나부끼던 시절이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