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이용득의 관문백물] (8) 화약확보 위한 밀사무역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1.20 18:06

수정 2013.01.20 18:06

초량왜관도에 보이는 부산 영도전경(18세기 중엽, 작자미상).
초량왜관도에 보이는 부산 영도전경(18세기 중엽, 작자미상).

개항 2년 전인 1874년 3월 15일 오후 11시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부산항에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이 났다. 주민들은 잠자리에 든 시간이라 뭐가 폭발을 했는지 몰랐다. 다음날 아침, 비가 그친 영도 해변에는 배 한 척이 반쯤 침몰된 채 드러누워 있었다. 화약을 실은 배가 폭발해 배에 탄 사람 12명 전원이 즉사했다. 이들 중에 왜관을 출입하던 동래부 소속 소통사(小通事·하급 통역관) 박사원이 포함됐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이 폭발사고에 대해 왜관에서는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에서 금지품목인 화약이 부산항에 밀반입 됐다는 것은 분명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협조 속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일제는 사고현장을 찾아 조사를 벌인 결과 소통사 박사원이 일꾼을 데리고 배에 실린 화약 하역작업 중에 횃불이 넘어져 폭발한 것으로 추정했다. 화약을 알선한 사람은 왜관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일본인 풍무칠(豊武七) 일행으로 더 이상 알 수 없음을 안타깝다고 했다.

조선시대 역관들은 때로는 밀무역에 손을 대기도 했다. 반출이 금지된 무기류를 비롯해 정보를 빼내어 오는 첩보원 역할도 했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이후에 화약과 같은 군수품에 대한 관심이 많아 주로 일본과 중국이 밀반입 대상국이었다. 당시 화약은 염초(질산칼륨)와 유황, 숯을 혼합해 만든 흑색화약이었다. 그런데 숯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염초와 유황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문제는 생산되는 이웃나라에서 날라와야 하는데 반출금지품으로 돼 있어 확보가 어려웠다. 염초는 주로 중국, 유황은 화산나라 일본에서 많이 생산됐다. 그래서 주로 사행길에 공식무역을 통해 수입하거나 아니면 특정상인과 밀사무역(密使貿易)을 했다. 특히 1664~1665년에 유황수입이 대규모로 이뤄졌다. 이는 비축된 유황의 소모 탓도 있지만 이 무렵 국내 유황 값이 크게 올라 각 군문(軍門)에서 다퉈 유황을 수입한 탓이기도 하다. 실제 1666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지금의 통영시(당시 거제현) 용초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주민 김씨가 무심결에 해안선을 바라보는 도중에 이상한 배 한 척을 발견한 것이다. 김씨는 이를 관가에 알렸고 경상도관찰사에서 군졸이 나와 조사했다. 그 배는 다름아닌 일본에서 유황을 가득 싣고 들어온 밀수선이었다. 배 선원들은 피봉사(皮奉事)와 임주부(林主簿)를 찾는다고 했다. 성씨 뒤에 말단 관직명을 붙여 들먹인 사람은 상인 피기문(皮起門)과 임지죽(林之竹)으로 이들은 오래 전부터 일본인과 유황밀수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다. 조정에서 동래부사와 통제사에게 명령해 이 두 상인으로 하여금 밀사무역을 시켰던 것이다.

중국이 청나라시대에 접어들면서 염초수출금지정책은 더욱 강화됐다.
1657년에 효종의 아우 이요가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을 다녀올 때 수행원들이 공모해 염초를 밀수하다 적발됐다. 청나라에서는 밀수가 적발될 적마다 칙사를 조선으로 보내 자기 나라 법으로 논죄해 참수(斬首)나 벌금형으로 중벌을 가하도록 했다.
그래서 조선조정에서는 때로 칙사들에게 설득과 감형을 위해 은을 뇌물로 주는 등 그야말로 '칙사대접'을 하면서 화약확보에 힘썼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