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사각지대 ‘상품권깡’
박근혜 당선인측이 135조원에 이르는 복지재원 중 상당수를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확보를 통해 마련하기로 하면서 상품권깡, 사채 등 그동안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던 지하경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 중 상품권깡의 경우 막대한 규모에도 불구, 제대로 된 통계조차 잡히지 않아 규제의 사각지대로 인식되고 있다.
2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상품권 환전소에서 거래되는 상품권은 대다수가 백화점 상품권이다. 장당 액면가가 다른 상품권에 비해 크고 유통량이 상대적으로 많다. 때문에 보통 4~5%의 할인율로 거래가 이뤄진다.
이날 상품권 환전소에서 롯데백화점 10만원권 상품권은 팔 때 9만6000원, 살 때 9만7000원에 거래됐다. 신세계상품권은 팔 때 9만5000원, 살 때 9만6000원에 거래가 이뤄졌다.
제화(구두) 상품권은 할인폭이 백화점 상품권에 비해 컸다. 제화업체의 경우 대량수요자를 상대로 직접 세일즈를 하기 때문이다. 이날 한 상품권 거래 사이트에서 10만원권 제화상품권은 엘칸토 7만5000원, 금강제화 7만4000원, 에스콰이아 6만5000원 등이었다. 최대 액면가에서 35%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상품권을 현금화할 수 있는 환전소의 경우 세무서에 신고를 하고 정식으로 영업하는 업소도 있지만 소규모 업소들은 대부분 이런 절차 없이 운영되고 있다. 액면가와의 차익만큼 지하경제로 유입되면서 정당한 세수 확보를 어렵게 하고 있다. 백화점 업계에서는 2011년 기준 백화점 상품권 규모만 3조원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 주유, 제화 등 다른 상품권 규모를 합치면 그 규모는 더욱 더 커지게 된다.
우리나라의 상품권 시장은 지난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된 이후 우후죽순으로 커졌다. 정부는 당시 상품권법을 폐지하면서 상품권 규제가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저해하고 소비심리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 결과 현재는 상품권을 발행할 때 국세청에 액면가에 따라 약간의 인지세만 내면 된다. 5만원 초과면 400원, 1만원 초과 5만원 이하면 200원이다. 1만원 이하는 인지세가 없다. 상품권 발행이 쉬워지면서 발행하는 업종도 백화점, 쇼핑, 문화, 제화 등 매우 다양해졌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온누리상품권을 발매하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이 같은 선순환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관련 규정이 없어 상품권의 정확한 규모파악이 불가능하고 탈세 등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상품권의 경우 액면가 그대로 현금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한국은행이 집계하는 화폐규모인 '통화량' 부문에는 제외돼 있다.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 실제 화폐처럼 거래가 되면서도 정작 실상을 파악할 수는 없는 '유령통화'가 된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상품권 역시 통화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관련법이 폐지된 이후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해졌다"며 "소비 편의를 위한 자연발생적인 측면이 있는 만큼 규모 파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특히 상품권 발매를 통해 자금을 쉽게 현금화(상품권깡)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비자금 통로로는 물론 일부에서는 개인들의 카드깡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상품권을 이용한 카드깡은 브로커가 카드결제를 통해 한도만큼의 상품권을 구입하면 그 자리에서 상품권깡의 할인율을 적용해 현금으로 환전해주는 방식이다. 기존에 사용하던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보다 거래가 쉽고 브로커 입장에서는 카드깡과 상품권깡 두 번에 걸쳐 수수료를 챙기게 된다. 일단 상품권이 어떤 경로로든 현금화가 된 이후에는 이를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상 관련법령도 전무한 상황이다.
상품권 발행처가 불분명하다 보니 진위를 파악하기 힘든 것도 문제다. 지난해 8월에는 90만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을 위조해 유통한 50대 남자가 검거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상품권을 큰 폭으로 할인해 판매한다고 광고하고 결제를 유도한 뒤 상품권을 보내지 않고 대금을 가로채는 소셜커머스 사기도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 관계자는 "유가증권 할인 등을 통해 기업들이 자금을 현금화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상품권)깡을 해주는 사람은 세금에서 제외되는 게 문제"라며 "세수 확보 차원에서 보면 주무부처를 통한 공식집계, 관련 규정 마련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im091@fnnews.com 김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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