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잔(스위스)=박지현 기자】 강소국이라는 말이 스위스처럼 잘 어울리는 나라가 또 있을까. 860만명에 불과한 인구지만 스위스는 자신의 힘으로 영구중립을 지켜내고 있는 나라다. 경제, 사회, 문화, 관광 등 수많은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과학기술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비행기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다니엘 베르누이와 천재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스위스의 과학은 근대 이후 인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다. 넓지 않은 땅덩어리를 26개의 캔톤이 나눠 갖고 있는 스위스가 강소국이라는 명성을 얻은 데는 고도화된 교육·과학 시스템 덕분이다.
■새학기마다 학생 30% '퇴출'
스위스의 과학을 이끄는 핵심 원동력은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연방공대다. 취리히 공대와 로잔 공대는 각각 기초와 응용과학 부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로잔공대의 총예산은 2011년 기준 750억 스위스프랑으로 1조원에 육박한다. 스위스연방공대의 교수 초임 연봉은 약 16만달러, 박사후 연구원은 월 8000달러를 받는다. 박사과정 학생들 역시 5000달러 이상을 매달 지원받는다. 반면 학부생이나 석사과정 학생들의 학비는 연간 1000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로잔공대 교수인 심임보 재스위스과학기술자협회장은 "입학 조건은 까다롭지 않지만 학년이 오를 때마다 20~30%의 학생들이 쫓겨난다"며 "결국 졸업생은 입학생의 10~20%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치열하다"고 말했다.
학구열은 학교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22일(현지시간) 찾은 로잔공대 캠퍼스는 방학 중임에도 시험기간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일본인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가 설계한 로잔공대의 랜드마크이자 중앙도서관인 '롤렉스센터'에는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학생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국의 대학도서관과 달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보다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토론하는 모습이 대부분의 테이블에서 펼쳐졌다.
■산학협력 '체질화'
로잔공대는 기업과 함께 하되 종속되지 않는다. 롤렉스센터는 롤렉스를 비롯해 네슬레, 스위스크레디트, 노바티스 등 스위스에 근거지를 둔 다국적기업들의 지원으로 건설됐다. 하지만 이들이 지원의 대가로 얻은 것은 롤렉스센터 곳곳에 롤렉스시계를 설치할 권리와 센터 내에 스위스크레디트 지점을 운영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로잔공대 전체 예산 중 기업 지원으로 충당되는 부분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심임보 교수는 "대학은 기술을 개발하지만 돈벌이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라며 "대학에서 개발된 특허나 원천기술을 이용한 로열티 수익을 제외하면 기업과 사업을 하는 등의 사업모델은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용학문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업은 로잔공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로잔공대의 철학은 '아이디어가 사업과 만나는 곳'이라는 학교의 슬로건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로잔공대에는 이노베이션스퀘어와 사이언스파크라는 거대 산학센터가 있다. 노바티스, 시스코, 노키아, 네슬레, P&G 등 글로벌 기업부터 수많은 벤처기업이 이들 센터를 개별적 또는 함께 사용하며 대학 연구진과 함께 연구개발(R&D)을 진행한다. 이 같은 협업 시스템은 로잔공대에서 얻어진 연구결과물들이 인류에 직접적인 혜택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특히 학부생조차도 산학협력을 맺고 있는 기업의 본사에서 수업의 일부분을 소화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실용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이 20대 초반부터 몸에 길들게 되는 것이다.
로잔공대 산학센터에서 시작한 벤처기업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주변기기 기업 로지텍이다. 성공과 함께 로잔공대를 떠나 거처를 옮겼던 로지텍은 몇 년 전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쓰는 R&D센터를 학교 내에 지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로잔공대를 비롯한 스위스 과학계와 대학들은 한국 등 다른 나라들과 달리 두뇌유출에 대한 걱정보다 해외 우수인력 영입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스위스 전체 연구인력 중 해외 인력 비중은 50%를 넘는다.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는 뜻이다. 세계 우수두뇌의 집합처인 미국을 월등히 앞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비율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우수 과학자에 대한 투자를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잔공대 역시 해외의 우수연구자를 영입하기 위해 아예 실험실 전체를 통째로 스카우트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jhpar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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