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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윌리엄 포사이스의 현대무용 ‘헤테로토피아’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4.15 16:30

수정 2013.04.15 16:30

[공연리뷰] 윌리엄 포사이스의 현대무용 ‘헤테로토피아’


초록색 운동복을 걸친 무용수는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건반을 응시했다. 이 무용수는 직전까지 달아나는 동료의 바지를 잡아 끌며 땅바닥을 뒹굴었던 사람이다. 대체 무슨 곡을 칠 것인가. 숨죽여 지켜보는 관객을 조롱하듯 그는 "음매" "음매" 무표정한 얼굴로 염소 소리만 냈다.

50여개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은 또 다른 방에선 뇌성마비 환자 모습의 무용수가 알파벳 글자를 들었다, 옮겼다, 버렸다를 반복했다. 알파벳을 가지런히 정렬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배열의 순서는 제멋대로였고 알 수 있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순간, 훤칠한 키의 무용수가 갑자기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몸을 비틀고 짐승 울음 소리를 냈다.
그 옆으로 뒤집어진 채 누운 테이블을 들었다 놨다 하며 요란한 소음을 내는 이도 있었다. 테이블 아래는 또 다른 세상이다. 무용수들은 그 아래에서 몸을 꼬고 비틀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이곳은 거대한 감옥인가. 아니면 정신병원? 그도 아니면 공동묘지나 매음굴, 우주공간 이름 없는 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일 수도. 20세기 무용계 혁신의 아이콘 윌리엄 포사이스(64)가 구축한 '헤테로토피아'(2006년작)는 이런 기괴한 세계의 연속이었다. 지난 10일부터 14일까지 경기 분당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이 작품이 아시아 초연됐다.

거대한 객석 자리를 치우고 관객은 기존 무대로 올라 공연의 일부가 됐다. 벽으로 가로막힌 큰 방, 작은 방 두 개의 공간 사이 작은 통로로 16명의 포사이스 컴퍼니 무용수들은 바삐 오갔다. 그 길을 따라 관객들도 이 방과 저 방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다르다(헤테로·hetero)'는 의미의 그리스 접두어가 붙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낯선, 다양한, 혼종된 공간을 뜻한다. 미지의 이상향이 '유토피아', 그 반대의 암흑 세계가 '디스토피아'라면 '헤테로토피아'는 말 그대로 '다른 세계'다. 이곳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어떤 가치로 받아들여야 하나. 이런 고민에 휩싸인 관객을 포사이스가 발견했다면 "난 작품에 아무 것도 담지 않았으니 그냥 보고, 즐기고, 웃으시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명쾌한 그의 말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나" "이제껏 알고 있던 진실은 누가 증명해 줄 수 있나"라는 난해한 물음과도 연결된다. 포사이스의 '헤테로토피아'는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논문 '다른 공간들'(1967년)에 나온 개념을 차용했다. 푸코가 그의 대표작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에서 강조했던 "이제까지 당연히 받아들인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들과 이 작품은 겹쳐 있다. 공연을 위해 내한한 포사이스는 "구조주의 철학의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진 않지만 푸코의 시각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했다.

포사이스가 '다른 세계'를 구축한 수단은 해체다. 통념과 제도, 이성의 질서를 해체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유가 작품 밑바닥에 깔려 있다. 피아노가 있으면 왜 그걸 쳐야만 한다고 생각하나, 이성적인 언어만이 과연 소통의 수단인가, 소음으로 뒤섞인 이 무질서에도 규칙이 감지되지 않는가. 무대는 해체와 전복을 통해 쉴 새 없이 질문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포사이스가 준비해둔 답은 없다. "표현하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메시지는 없다. 난 과학자가 아니다. 주술사에 가깝다"는 그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 클래식 발레에 뿌리를 둔 전위적인 현대무용가 포사이스의 안무는 파격의 선을 넘었다. 무용수들의 몸은 뛰고 넘어지고 울부짖고 뒤틀린다.
원형만 남은 발레 테크닉에 기이한 동작들을 섞어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미학에 도전했다. 이번에 한국 관객들이 체험한 '헤테로토피아'는 그의 명성을 과장 없이 확인시켜준 무대였다.
기묘하면서도 매력적인 모던발레에 한동안 뒷머리가 어질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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