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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18일 잠실구장.
롯데와 LG의 경기가 열리던 중 2루에 나가있던 주자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바로 롯데 안방마님을 맡던 故 임수혁이었다.
임수혁은 2루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더니 이내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응급처치만 빠른 시간 내에 이뤄졌어도 더 큰 화를 모면할 수 있었으나 13년 전의 경기장 내 응급처치 시스템이 생각보다 미비했다. 응급처치를 하러 나온 요원들 역시 미숙한 절차로 인해 시간을 지연시켰다.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마해영(現 XTM 야구 해설위원)은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마 위원은 “원정경기였기 때문에 (임)수혁이 형은 집에 다녀온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경기 당일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며 “(경기를 하기 전에) 내 방에서 같이 삶은 달걀을 먹으면서 경기를 준비했다.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임수혁 하면 떠오르는 경기가 있다. 바로 지난 1999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이다. 임수혁은 당시 롯데가 3-5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9회초 삼성 마무리 투수 임창용으로부터 동점 투런포를 터뜨렸다. 이 홈런으로 승부를 연장까지 끌고 간 롯데는 삼성에 6-5 역전승을 거두며 4년 만에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시리즈 전적 1승3패 후 기적적인 3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롯데는 그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서울고, 고려대를 졸업한 뒤 지난 1994년 롯데에 입단했던 임수혁은 당시 롯데의 4번 타자였던 마해영과 함께 ‘마림포’라 불리며 롯데 타선을 호령했다. 1995년 본인의 가장 많은 홈런인 15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마해영과 함께 ‘소총부대’였던 롯데를 진두지휘한 그는, 그해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주가를 올렸다.
이듬해의 활약은 더욱 눈부셨다. 타율 0.311 76타점을 기록한 임수혁은 타격과 타점에서 각각 5위와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주전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2000년 4월18일을 끝으로 그의 모든 기록은 멈추고 말았다.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그의 야구인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유는 다름 아닌 허술한 응급 의료 시스템 때문이었다. 지난 2000년 이미 한 번의 사고를 경험한 잠실구장의 의료 시스템은 어떨까?
현재 잠실구장 응급 구호단은 자동제세동기와 휴대용 산소통, 심전도 모니터 등 호흡 곤란시 처치할 수 있는 기본 장비를 갖추고 있다. 또한 잠실구장은 지난 2009년부터 정문 외에 1-5문 앞에 구급차 한 대를 추가 배치해놓은 상태다. 이로 인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선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임수혁의 사례가 경기장 내 의료시스템 개선을 이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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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롯데 자이언츠> |
“당시에는 응급 시스템 구축이 전혀 돼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만약 구급차가 가까운 곳에 대기하는 등 사후 조치가 빨랐다면 이렇게 큰 화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마해영 위원의 말이다.
마 위원은 대학교 때부터 동고동락했던 임수혁을 이렇게 회상했다. “항상 밝은 모습이었고, 재미있는 형이었다”며 선배를 떠올린 그는 “후배들에게 밥이나 술을 잘 사주는 자상한 형이자 친구였다. 늘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형이었다”고 지난 추억을 떠올렸다.
임수혁이 그라운드에 쓰러지고 만 13년의 세월이 지났다. 당시 그와 함께 뛰었던 마해영과 박정태, 공필성, 전준호, 김응국 등은 이제 각 구단의 코치와 방송사 해설위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마 그도 살아있었다면 코칭스태프의 일원으로서 후배 양성에 열정을 쏟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던 임수혁이 그리워지는 하루다.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syl015@starnnews.com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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