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이용득의 관문백물-(26)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6.02 16:47

수정 2014.11.06 06:36

짐꾼들이 마치 상여를 메고 가는 것 처럼 피아노를 운반하는 1900년초의 모습.
짐꾼들이 마치 상여를 메고 가는 것 처럼 피아노를 운반하는 1900년초의 모습.

#사진설명)짐꾼들이 마치 상여를 메고 가는 것 처럼 피아노를 운반하는 1900년초의 모습.



우리나라에 피아노가 언제 들어왔는 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설이 분분하다. 최초의 피아니스트인 김영환(1893~1978)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양악백년'에서 1894년 우리나라 광무국 기사로 초빙된 프랑스인 마르텔(Emile Martel)이 1905년 초에 결혼을 하면서 피아니스트인 그의 아내 아말리(Amalie)가 가져온 것으로 보았다. 아말리는 독일인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악대장을 지낸 에케르트(Franz Eckert)의 맏딸이다.

그러나 최근에 음악이론가 손태룡은 이 보다 5년이나 앞선 미국의 북장로교 해외선교사인 리차드 사이드보텀(Richard Henry Sidebotham, 한국명 사보담·史保淡)이 1900년 초에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사보담목사는 결혼직후 아내인 에피(Effie Alden Bryce)와 함께 1899년 부산에 도착해 대구로 발령을 받아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 보다 3년 앞서 제3대 부산해관장 헌트는 1897년에 부산주재 영국부영사를 겸임할 때 빅토리아여왕 즉위 6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면서 그의 부인이 초청인사에게 피아노 선율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헌트 해관장은 그해 6월 20일과 21에 양일에 걸쳐서 성대하게 축하 기념파티를 열었다. 첫날에는 부산항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복병산 산자락의 해관장 관사에서 부산주재 외국인 및 지역유지를 초청해 저녁만찬과 함께 화려한 불꽃놀이를 했다. 이러한 헌트 해관장의 활동상황을 미루어 볼 때 이미 1900년 말에 부산에는 피아노가 반입돼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피아노가 들어온 것은 1900년 전후로 보여진다. 17세기 말 이탈리아의 크리스토포리에 의해 피아노가 탄생한 지 약 200년이 지난 뒤에 국내에 반입된 것이다. 서양악기다 보니 이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외국인이 도입해 목회활동 등에 주로 사용됐다.

예나 지금이나 피아노는 아무나 쉽게 옮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더군다나 구한말 당시 도로사정이나 운반도구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을 당시 어떻게 이러한 피아노를 무사히 목적지에 운반을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1900년 당시 사보담 부부가 피아노를 가져오면서 당시 운반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해 미국친지에게 편지를 입수할 수 있었다.

사보담 부부는 미국에서 부산항에 도착한 피아노를 다시 낙동강 나룻배에 싣고 수로를 따라 사문진선착장(현 경북 달성군 화원)으로 옮겼다.그리고는 강변선착장에서 16㎞나 떨어져 있는 대구 시내 집까지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 첫날에는 21명, 둘째 날은 20명, 셋째 날은 31명의 짐꾼을 고용해 사흘에 걸쳐 작업했다. 그런데 짐꾼들이 피아노 운반에 상여용 막대기를 사용했다. 상여용 막대기로 운반도구를 만들어 피아노를 올려놓고는 밧줄로서 단단히 묶은 다음 양편으로 각각 10여 명씩 마치 나무상여를 메고 가는 것처럼 운반했다.
논과 산길,언덕길,개천 등을 지나면서 가까스로 처소에 도착했는 데 막상 거실에 넣으려니까 출입구가 좁고 낮아서 결국 문을 뜯어내고 들여놓았다. 사보담부부가 피아노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짐꾼들과 동행하면서 운반한 피아노였지만 케이스에 흠집이 나고 건반 2개가 파손되는 등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지만 조립완성 후 조율이 잘 되어 연주하는 데는 이상이 없었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