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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칼럼] 여인 5代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8.05 15:33

수정 2014.08.05 15:33

(이 글을 읽으려면 현아→은주→정자→갑순→아기로 올라가는 여인 5대의 이름과 나이를 외어두어야 함)

오늘은 전업주부 은주(37)의 외동딸 현아(7)가 초등학교 입학한 날. 은주 부부가 조촐한 잔치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현관에서 딩동, 벨이 울린다. 문을 여니 은주의 친정엄마 정자씨(62)가 서있다. 현아가 할머니! 외치며 달려든다. 정자씨는 "아이구 내 새끼" 하며 현아를 품에 안는다.

3대가 떠들썩한데 다시 현관 벨이 울린다. 현관에는 정자씨의 엄마 갑순씨(82)가 서있다.
팔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하다. 현아와 은주 모녀가 동시에 할머니 하고 외쳤지만 갑순씨는 일곱 살짜리 증손녀만 품에 안는다. 4대가 한창 떠들고 있는데 다시 현관 벨이 울린다.

현관에는 갑순씨의 엄마이자 정자씨의 할머니인 아기씨(97)가 서있다. 주위에 젊은이들의 부축을 받고 서있는 노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하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하다. 그러나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품이 세월의 공격쯤은 무섭지 않다는 달관한 표정이다.

은주와 현아가 동시에 다가가니 노할머니는 증손녀와 고손녀의 손을 살포시 잡는다. 손녀가 되는 정자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오늘만은 딸(증손)과 손녀(고손)에게 양보할 마음이 생긴다. 옆에서 지켜보는 갑순씨는 가벼운 혼란에 빠진다. 이 곱게 늙은 노인과 나는 모녀 관계 아니면 자매 관계?

한국에서 5대(代) 가정은 흔할까, 귀할까. 의외로 귀하다. 아무리 대가족주의의 전통이 무너졌다고 해도 그래도 한국인데, 아직은 가족 우선의 전통이 맥맥이 살아 있을 것이란 짐작은 대체로 어긋난다. 노령화니 고령화니 하는 인구학적 용어들은 자연스럽게 5대 가족의 번성과 연결될 것이란 기대도 버리는 게 낫다.

2012년 11월 대한의사협회와 한국노바티스가 공동으로 5대 가족찾기 운동을 벌였다. 한 집에서 동거 안해도 생존가족과 연결 관계만 확인되면 수상 대상이다. 그 결과 22가족을 찾아냈다. 이 가운데 1대의 나이가 최고령인 가족은 전남의 공말례씨 가족이다. 공말례 할머니의 나이는 108세다. 또 1대 나이가 가장 적은 가족은 충북의 김묘희씨 가족이다. 김묘희씨는 88세다. 만약 김묘희씨가 한 살짜리 고손주의 돌잔치에 참석했다면 1대와 5대의 나이 차는 87세다. 서두에 픽션으로 엮은 현아와 아기씨의 나이차인 90세와 비슷하다.

5대 가족은 점차 줄고 있다는 게 이번 캠페인에서 확인됐다. 5대 가족찾기 캠페인은 작년이 제2회 행사였고, 1회는 2006년 8월에 실시됐다. 1회 때는 26가족이 확인됐다. 장수 추세에 비추어보면 2회 때는 더 늘었어야 하는데 반대로 줄었다. 왜 그럴까. 생존은 해 있지만 가족 간의 연결이 끊어져 파악대상에서 빠졌기 때문 아닐까. 독거노인 숫자 증가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오래 산다. 2011년 통계청 생명표를 보면 남성의 기대수명은 77.6세지만 여성은 84.5세다. 남녀 기대수명의 격차는 좁혀지고 있지만 줄곧 여성이 길다. 남성의 우월감의 한 기둥이었던 남아선호사상은 홀연히 사라졌다. 2008년부터 호적법·호주제가 폐지된 결과다.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비율은 올해 50%에 이르렀다. 아마 내년에는 여초(女超)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여자가 무슨 공부냐는 조부의 일갈(一喝)로 아기씨는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5대손 현아는 아마 하버드대나 옥스퍼드대 졸업장을 받아올 것이다. 지금 남성의 대학 진학률은 68.8%지만 여성은 74.3%다.

인간은 점차 100세까지 산다. 여성이 장수를 주도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유전공학 덕분에 조만간 인간은 150세까지 산다고 한다.
이것도 여성이 주도할 것이다. 올 7월 첫 주간(1~7일)은 여성주간이었다.
벌써 18회를 맞는 여성만을 위한 경축의 날들이었다. 그런데 왜 조용히 지나갔을까.

김성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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