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백량짜리 ‘이사열차’
그러나 지금 저희 식구들은 설국열차가 아니라, 채 풀지 못한 백 칸짜리 ‘콘테나(귤이나 이삿짐 등을 나르는 컨테이너 박스의 제주식 발언)’ 열차에 탑승한 상황입니다. 퍼내도 퍼내도 줄지 않는 화수분도 아니고, 가도 가도 닿지 못하는 열차 앞칸도 아니고, 이게 뭐람? 다시 둘러보니 상황은 좀 더 심각하네요. 건드리지도 못한 컨테이너 오십 개 사이로, 어설프게 손 댄 나머지 오십 개에서 튀어나온 짐들-분류하기 모호한 각종 서류, 신문조각, 전선, 소품, 허섭스레기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 난리통도 이런 난리통이 없네요. 포화를 뚫고 ‘엔진’에 침입해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다음 주에나 설치가 된대서, 아쉬운 대로 휴대전화에 연결해 쓰고 있어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에그’는 도대체 어디 간 걸까요? 에그머니나. 다행히 곰손 곰발인 저와 달리 우리 곰서방은 열차의 설계자이자 파괴자인 냄쿵민수(송강호 분) 못잖은 도마뱀인지라, 아이폰을 모뎀으로 활용해서 인터넷을 쓸 수 있게 해줬습니다. “도마배~앰, 도마배~앰,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낸다~(자기도 모르게 이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는 당신! 당신의 나이는 이미 중년, 아무리 감춰봐도 소용없어요.)”
어느 건축학도가 올린 마감 전날의 풍경. 차마 저희집 100량짜리 ‘이사열차’의 모습을 찍어 올릴 순 없고요, 지금 제 방이 딱 이렇습니다. 아이폰이 이 열차의 심장부 엔진을 돌리는 비밀의 아이? (사진=네이버 mukogaoka 님의 블로그)
이사 전날, 엄마는 억지로 퇴원을 했습니다. 제가 중요한 짐을 챙기는 동안, 구리구리들을 맡아 주시겠다고요. 외할머니가 편찮으신 동안, 소구리의 ‘육아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각해진 상태였거든요. 고 며칠 엄마가 새 집을 오가며 일을 보는 동안 소구리는 요구리를 봤습니다. 평소 동생 똥 기저귀도 잘 갈아주고(샤워기로 엉덩이도 잘 씻겨줍니다. 물티슈는 절대 안 써요.), 시리얼도 우유에 말아 잘 먹였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방학인데 놀지도 못하고 아기만 본다는 데 짜증이 났나 봐요. 아기를 본다는 명분을 내세워, 올레TV로 <런닝맨>과 <정글의 법칙>만 죽도록 봤다는 건 비밀! 아기 보는 날에는 일기 빚을 탕감해준 것도 비밀! 아기는 아기대로 짜증이 늘어,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는 상황이 됐고요.
이사 당일에도 일하는 분이 일곱이나 오셔서, 절대로 일손이 부족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가 이중 삼중으로 일하는 걸 싫어해서요, 호기롭게 “어차피 제 손이 가야하는 물건들이니 컨테이너를 풀지 말고 그냥 두고 가시라”고 했지요. 그 양반들도 시간 때우기 식으로 일하지 않아도 되니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 손이 가야 하는” 책과 부엌세간이 전체 짐의 80%라는 것이 함정! 육지에서 내려올 때 물어물어 제일 저렴한 업체를 이용했었는데요, 얼마나 일을 함부로 했던지 살림이 죄 엉망이 됐었습니다. 가구는 까지고 도자기는 깨졌죠. 이번에는 곰서방이 직접 나서서 조금 비싼 업체를 선택했습니다. 도내에서 이동하는 가격이 육지에서 제주 내려온 가격에 거의 육박하더군요. 본전 생각이 났지만 꾹 참고, 곰서방 결정에 따랐습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가뜩이나 보수적인 제주도에서도 거칠기로 소문난 남자들과 인테리어를 하면서, 여자인 제가 나서봤자 별무소득인 게 많았거든요. 남편이 나서자 단번에 해결되는 일들을 몇 번 겪고 나니, 더 이상 허공에 대고 악악대는 까마귀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남자 대 남자로 얘기하자” 이런 표현이 먹히는 사회인 거죠, 여기가.
가정생활도 직장생활이나 비슷해서요, 어떤 ‘결정적인’ 결정을 제가 내렸다가 실수하면, 두고두고 남편에게 욕을 먹게 되더군요. 요즘 같은 시대에 남편을 상사처럼 모시란 얘기는 아닙니다. 더구나 저는 전직 페미니스트, 훌쩍. 다만, “작고 예쁜 청소기 대신 남편이 마음에 들어하는 무거운 청소기를 샀더니,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청소를 해 주더라” “비싼 에어컨 선택을 남편에게 맡겼더니, 전기세 타박 않고 빵빵 틀어주더라”는 다른 여선배들의 경험이야말로 멸치 우려낸 국물 같은 삶의 지혜더란 말입니다. 이사도 마찬가지였어요. 남편이 직접 업체를 선택하니, 그쪽에서도 훨씬 신경 써서 이삿짐을 날라주고 애프터서비스도 확실하게 해주더군요. 곰서방도 이사의 전 과정에 깊이 개입했고요. 조금 전까지 곰서방은 인테리어 업자가 팽개치고 간 베란다 화단에 모르타르를 직접 발랐답니다. 방수 페인트를 바르고 구리구리들과 함께 채소를 기르겠다나 뭐라나요.
마감과 ‘포텐’: 데드라인 학습법
마감과 포텐의 상관관계로 검색한 그래프. 저작권자를 모르겠습니다. 리플 달아주세요. ㅠ.ㅜ
바퀴벌레 양갱이처럼 늘어지는 신변잡기 칸을 지나 마침내 오늘의 고갱이 엔진 칸까지 오신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정차할 역은 ‘데드라인 학습법’, 데드라인 학습법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 왼쪽입니다, 쿨럭...
지금은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2년 전 안철수 의원이 멘토 중의 멘토로 막 ‘핫’해지기 시작할 때의 얘깁니다. 당시 안 교수는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에 출연해 ‘데드라인 학습법’을 소개했지요. 간단히 정리하자면 “마감을 정하고 뇌를 한계 상황에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백신을 만들 때 매달 새로 배워야 하는 기술이 나오면, 그 기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잡지사에 전화를 했답니다. “신기술에 대한 원고를 쓰겠다”고 먼저 제안을 하는 거지요. 잡지사는 십중팔구 지면을 내줍니다. 그렇게 마감을 설정한 다음,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원고를 썼다고 해요. 마감도 일종의 약속이니까요, 약속을 어기면 스스로 부대끼는 자신의 성격을 활용했다고 합니다. 마감날 원고를 넘기고 나면, 몸은 비록 피폐해지지만 그 기술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게 된다는 거지요.
마감이 뇌 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일반인들에게도 체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험이나 프로젝트 마감 전날 ‘포텐(잠재력을 뜻하는 포텐셜의 준말)’ 터지는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셨잖아요. 벼락치기 초치기 상황의 초긴장 초집중 상태에서는 뭘 읽어도 뇌에 쏙쏙 들어오고, 어떤 걸 써도 명문이 됩니다. 작가나 교수처럼 글 쓰는 것이 직업인 분들 사이에선, “글을 내가 쓰나? 마감이 쓰지?”와 같은, 그다지 재미없는 농담도 널리 통용됩니다. “공부를 내가 하나? 엉덩이가 하지?”와 같은 모범생 농담의 중년 버전이랄까요. 무섭게 몰입하는 건 맞는데 ‘몰입의 즐거움’이라고 하기엔 뭔가 옹색하고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극단적인 한계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거죠. 여기서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신다면 뭐, 할 수 없습니다만(실은 저도 좀 느낍니다요. 이건 뭐 변태도 아니고, 쿨럭...)
학습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일본 책자 중에는 <뇌가 기뻐하는 공부법(모기 겐이치로 저)>이란 것도 있네요. 이 책이 소개하는 데드라인 학습법도 안 의원의 공부법과 궤를 같이 합니다. “뇌를 시간으로 압박하라”는 주문이죠. 저자는 도쿄대 물리학 박사 출신으로, <소니> 컴퓨터사이언스연구소 수석을 지냈고 도쿄 공업대학 대학원에서 강의하며 뇌와 인지과학에 대해 얘기하는 저명한 대중과학자라고 합니다. 탈세(와 친한류?) 논란으로 공영방송 NHK에서는 하차했지만, 여전히 활발하게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고 해요. 이 양반이 소개하는 뇌활용법은 시간적 제한을 두어 뇌를 압박하는 것 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는데요, 약간 어려운 일에 대한 성공의 경험을 맛보게 하고, 뇌가 가장 활성화되는 황금시간대를 찾으라는 겁니다.
마감과 포텐의 상관관계를 활용한 시간 쪼개기는 고시생은 물론, 하다못해 섬 아지매에게도 유용합니다. 출퇴근도 없고, 상사도 없고, 데드라인도 연장근무도 휴가도 없는 저는, <탐라일기>의 마감을 기준으로 일주일을 삽니다. 몸매를 유지하려고 피트니스 센터에 다니듯 정신이 늘어지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자구책이지요. 평소에는 금요일 밤을 마감으로 정해두고 달리는데요, 수요일까지는 그냥저냥 살다가도, 목요일 저녁부터는 지하철 레이스 중에 ‘급똥이 매려운’ 기관사마냥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금요일 아침부터는 요긴하게 써먹을 문장들이 떠오르고, 서두를 어떻게 시작할지도 대충 자리가 잡히지요. 그런데 최근 인테리어와 이사라는 위기 상황에서, 기사가 포털에 나가는 토요일 아침에 뇌가 활성화돼 극적으로 원고를 넘기는 체험을 두어 번 겪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포텐이 터지는 시간이 점점 미뤄지고 있습니다. 이러다 제대로 한 번 펑크낼 기세. 어쩔...
방학숙제는 벼락치기가 맛
‘병맛(무언가 모자라고 어이 없는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실소)’ 유머를 널리 전파시킨 웹툰계의 전설 <이말년 월드>. 지하철 레이스를 벌이다 급하게 대변이 마려워 위기를 겪는 장면을 그려, ‘급똥’이란 유행어를 낳았습니다.(사진=이말년 월드 캡춰)
지난주에 콩쥐 팥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습성도 유전이 되는 모양입디다. 소구리 역시 제 어미를 닮아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마감 직전에야(또는 마감을 살짝 넘겨) 겨우 하는 버릇이 있어요. 초딩 1학년 때 기괴한 도형 문제를 네 시간이나 잡고 있다가, 축구하러 가기 오 분 전에(“소굴아, 이제 축구 안할 거니?”) 후다닥 풀 때 알아봤습니다.
소구리가 다니는 제주국제학교에서는 수학 숙제를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해서 게임처럼 풀게 하는데요, 이게 딱 <스타 크래프트> 같더라고요(아, 요즘은 스타크가 아니라 <롤-리그 오브 레전드>인가요?). 동시에 접속한 다른 나라 아이들과 수학 문제로 한 판 붙으면 세계 순위가 나옵니다. 배틀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딱 환장하게 설계돼 있어, 제가 봐도 퍽 재미납니다. 해서 지난 방학에는 소구리를 믿거니 하고 자율에 맡겨 놓았죠. 그랬더니 게임만 진탕 하고 정작 숙제는 하나도 안 했더라고요. 선생님께서 수준에 맞는 문제를 개인 폴더에 넣어주신 것 같던데, 기간이 지나서 폴더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겁니다. 이 문제를 사흘 전에야 발견하고 제 방식으로 해결했죠. “김소굴군! 숙제가 사라진 건 본인의 잘못이다. 변명은 필요 없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풀도록. 엄마는 도와줄 수 없다. 실시!” 아이는 남은 사흘 동안 징징 울며 결국 다해갔는데, 덕분에 수학 마법사(?)가 되었다는 전설이, 쿨럭.
그런데 이번 여름엔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가 ‘전혀’ 없더라고요. 담임 선생님은 천사처럼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씀하셨어요. “You deserve it(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으니 충분히 놀아도 된다는 겁니다. 열심히 공부한 거 맞아? 완전 실컷 놀았는데! 숙제 없어도 괜찮을까? 방학이 두 달이나 되는데! 덕분에 소구리는 레이지보이에 늘어져 삶은 옥수수나 뜯어먹으며 티비를 실컷 봤지요. 엄마 공격을 방어하려고 할머니 말씀까지 주워 삼키며 선수를 치더라고요. “이런 게 방학이지! 여름에 공부하면 지쳐.” 아놔~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노는 꼴을 보다 못해 엄마가 자체적으로 내 준 숙제는 일기와 독후감이었습니다. 영어는 학교에서도 충분히 하니 집에선 국어 실력을 높이려고 생각해낸 조처였어요. “국어 못하고 일(공부) 잘하는 놈 없다”는 게 저의 평소 지론인 데다, 가물에 콩나듯 칼럼이나 출연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살면서 가장 필요한 건 고급 한국어 능력”이라고 외치는 곰서방이 제게 특별히 당부한 거니까요. 그런데 학교 숙제도 모르쇠하는 녀석이 엄마 숙제 따위를 성실히 할 리가 있나요. 6주가 지난 지금, 일기 여섯 개, 독후감 세 개가 녀석의 실적입니다. 개학이 딱 2주 남았는데 말예요.
엊저녁에는 무리한 줄 알면서 밀린 일기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녀석은 제 휴대전화를 빌려가 날씨를 검색하고 앉았더군요. 우리 때는 신문을 모아놓지 않는 이상 무조건 ‘날씨 맑음’이었는데 말예요. 세대가 달라지니 밀린 숙제 하는 방식도 진화하더라고요. 곰서방은 그 옆에서 한술 더 뜹니다. “괜찮아, 괜찮아, 일기는 원래 한꺼번에 쓰는 게 맛이지. 아빠는 <탐구생활>도 하루만에 했다고(소구리는 탐구생활이 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구라도 늘고 다 그러는 거지. 엄마도 마감 닥치니 이 얘기 저 얘기 섞어서 자~알 쓰잖아.” 이 냥반아, 그건 내가 평소에 애 보느라 너무 바빠서... 지난주까지 인테리어하고, 이번주는 이사주간이라 하도 쓸 게 없어서... 아, 당최 영이 안 섭니다, 영이 안 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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