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이용득의 관문백물] (38) 수탈의 곡물 ‘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8.25 17:43

수정 2014.11.04 09:00

일제가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해 효율적으로 쌀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군산항 뜬다리 부두.
일제가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해 효율적으로 쌀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군산항 뜬다리 부두.

고려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왕도로 운반하는 것을 조운(漕運)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사용된 선박이 조선(漕船)이다. 18세기 초 일본 쓰시마에서도 부산포의 초량왜관에서 조선 쌀을 싣고 돌아오는 선박을 미조선(米漕船)이라 불렀다. 이들 선박은 쓰시마 상인의 개인소유 선박이었다. 일본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조선이라는 용어마저 이곳 주민들이 사용한 것을 보면 얼마만큼 쌀에 대한 애착이 컸던지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쌀 생산이 제대로 되지 않던 쓰시마 입장에서 보면 미조선의 운항실태가 바로 섬주민(약 3만 명)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경상도 대구부근에서 세곡으로 받아들인 연간 약 2만가마의 쌀이 왜관으로 흘러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거주하는 500여명의 식량과 공작미(公作米)로 사용됐다.

우리나라는 개항원년인 병자년에 가뭄이 극심해 흉년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으로 미곡수출이 증대되면서 곡물가격이 뛰고 품귀현상이 나타나다보니 지방관들은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미곡이 타지방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방곡령을 실시할 정도였다. 문제는 일본으로 수출되는 미곡이 문제였다. 실제 방곡령은 천재지변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국재의 식량사정이 곤란할 때 발령하기로 돼 있다. 조일통상장정에는 이를 발령하려면 반드시 1개월 전에 지방장관이 일본영사에게 통지해 각항에 거류하는 일본상인에게 공시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1889년 5월에 흉년이 들자 황해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 일본영사에게 통고도 없이 갑자기 방곡령을 내려 이 지역의 미곡반출을 금지시켜 버렸다. 이곳에서 곡물 2130석을 구입한 일본상인 이소베와 아시가와 등은 수출을 위해 개항장인 인천항으로 미곡을 운송해야만 하는데 이걸 할 수 없으니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의 강력한 항의요구에 따라 우리 정부는 다음해에 방곡령을 해제하고 1893년에 11만엔을 보상해 주었다. 한.일간에 외교적 분규사건으로 야기된 방곡령 제1호 사건은 이렇게 시작이 됐다.

사실 인천항 개항도 우리나라 미곡수출과 무관하지 않다. 구한말 정부는 1881년 2월 '한국의 미곡을 수출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수락한다면 향후 20개월 안에 인천항을 개항할 용의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본은 이를 주저없이 수락하여 1883년 1월 1일에 개항을 했으나 당초 약속과는 달리 한국미곡을 사들여 일본으로 반출하기에 혈안이 됐다. 개항 이후 미곡의 주요 수출항은 부산항이었다. 1890년대 초반이 되면서 인천항이 경인지방을 비롯해 평안도.황해도.충청도.전라도에서 곡물이 집산돼 수출 주도항으로 역할을 했으나 중반 이후는 목포.군산.진남포항 등이 개항되면서 다시 부산항이 최대 쌀 수출항이 됐다.

1901년에도 흉년이 들자 식량난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번에는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의 주도하에 베트남에서 안남미(安南米) 30만석을 수입해 시장에 풀어서 어느 정도 굶주림은 면했으나 품질에 대해 말이 많았다. 1900년대 일본은 급속히 산업화와 도시화가 되면서 식량부족이 심각했다.
이에 내수증대에 부응하면서 쌀값을 낮추고 외화손실을 피하기 위해 1920년부터 1939년까지 식민지에서 쌀을 수입했다. 바로 이러한 쌀수탈의 대표적인 항만이 인천항과 군산항이었다.
특히 군산항은 식민지 조선의 쌀을 수탈해 가던 대표적인 수송기지로 번성했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