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에서 황약사(양가휘)는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이 기억력 때문이라 말한다.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 매일이 새로울 거라며 친구인 구양봉(장국영)에게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주는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이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친구 구양봉의 형수 ‘자애인(장만옥)’.
하지만 자애인이 사랑하는 이는 구양봉이었고, 그런 자애인을 구양봉도 사랑했지만 천하를 호령하는 검객이 되기 위해 그녀가 있는 백타산을 떠나 사막에서 홀로 살인청부업자로 살아간다.
매년 복사꽃이 필 때면 황약사는 늘 구양봉을 찾았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신 뒤 황약사는 구양봉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자애인을 만나기 위해 백타산으로 떠났고 구양봉은 그런 황약사로부터 1년에 한 번씩 그녀의 소식을 듣는다.
‘동사서독’에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랑을 곁에 두고도 늘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황약사는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술김에 사랑을 남발한다.
사랑하지도 않는 이에게 헛된 약속을 하고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황약사의 무책임한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 상처가 된다. 상처는 검객들의 검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왕가위 감독의 저주받은 걸작 ‘동사서독’이 20여년 만에 ‘동사서독 리덕스’로 개봉됐다.
동양을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그가 1994년 ‘동사서독’을 처음 내놓았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신용문객잔’같은 멋있는 무협영화를 기대했으나 ‘동사서독’은 전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관객들이 가장 실망했던 부분은 검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액션장면이 거의 없다는 것. 대신 구슬픈 음악 속에서 가슴을 후벼 파는 대사들이 마치 검객들이 휘두르는 검처럼 날카롭게 번득이곤 했다.
그렇다. 애시 당초 ‘동사서독’은 무협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랑영화였다.
하지만 ‘동사서독’은 내용을 떠나 형식에서도 일탈을 마구 일삼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도무지 시간의 흐름이 없다는 것. 하지만 상처로 끝이 난 과거의 사랑은 언제나 한 편의 그림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내내 걸려 있기 마련이다.
그 그림의 제목은 ‘추억’이다. 그림이나 추억이나 시간의 흐름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비록 감독 스스로 시간의 흐름을 정리해주기 위해 ‘리덕스’ 버전을 새로 내어 놓았지만 ‘동사서독’의 진정한 맛을 아는 마니아들은 오리지널 버전을 더 좋아한다.
특히 현실에서 사랑의 상처를 받았을 때 보면 이 영화의 진가를 알게 된다.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술이 주된 소재인 만큼 어른이 돼서는 술 한 잔 걸치고 보면 더 끝내준다.
백타산에 남아 구양봉을 그리워하는 자애인. 왜 구양봉과 혼인하지 않았냐고 황약사가 묻는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구양봉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하지만 자애인은 결국 그것을 후회하며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랑에 승부는 무의미하다는 통곡만을 남긴 채. 그녀가 죽자 황약사는 더 이상 구양봉을 찾지 않았고, 형수가 세상을 떠나자 구양봉도 사막을 뜬다.
극중 맹모살수(양조위)의 대사처럼 술과 물의 차이점은 술은 마시면 몸이 달아오르지만 물은 마시면 몸이 차가워진다.
하지만 그 때문에 술은 기억에 남지만 물은 그렇지 않다. 사랑은 술과 같다. 취하기 마련이다.
아니, 취하기 위해 한다. 마침내 기억 때문에 괴롭지만 되레 기억하려 한다.
술맛은 쓰지만 사랑을 알고 나면 달라진다. 황약사의 말대로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고 잠시나마 상처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그리고 술이 깬 후 다시 후회를 한다.
사랑은 검(劍)과 같다. 상처를 준다. 사랑을 알고 나면 누구나 손에 검이 주어지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또 남에게 사랑받는 느낌을 알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세상은 그렇게 검객들로 넘쳐 난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다. 상처가 아무는 그 시점에 기억은 추억이 되고 이젠 그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취생몽사는 일찌감치 자애인이 구양봉에게 던진 농담이었다. 죽기 전 자애인은 황약사에게 술을 건네며 구양봉이 자신을 잊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오래 전 자애인은 구양봉에게 늘 말했었다.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고.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더 선명하다.
시간의 재(灰)에 파묻힌 기억은 사랑의 긴 그림자였다. 검의 끝이 향한 곳은 천하(天下)가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1995년 11월 개봉. 2013년 12월5일, 동사서독 리덕스 개봉 러닝타임 100분.
(울산=뉴스1) 이상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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