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와 대한제국 518년(1392~1910). 우리에겐 태조 이성계에서 순종에 이르는 25명의 왕과 2명의 황제, 그리고 찬란했던 조선왕조의 왕실(王室)·황실(皇室) 문화가 있었다.
조선의 임금들이 살았던 창덕궁과 조선왕릉 40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종묘대제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돼 인류를 위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조선왕조 역사의 산 증인인 왕가의 후손들도 우리와 같이 숨쉬며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조선왕실의 맥은 고종 황제의 증손자 이원 황사손(李源 皇嗣孫·52)으로 이어진다. 그는 2005년 이구 황세손 사망 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의해 ‘황실의 적통을 이은 자손’으로 추대됐다.
조선황실의 적통을 이은 지 9년. 이원 황사손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을까. 이 시대에 어떤 통찰과 혜안을 줄 수 있을까. 설을 앞두고 이원 황사손을 만나 그의 생각을 들어 봤다.
- 황사손이 된 지 9년이 됐다. 삶의 변화는.
▶ 삶이 확 달라진 것은 없다. 4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으로 가고 있다. 낮은 곳으로 가는 것, 사람을 만나면 사람 마음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 등을 많이 배운다.기득권, 지식, 능력이 있으신 분들이 저를 보면서 호감을 갖고 얘기하지만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 시대에 맞지 않다는 말씀을 많이 한다. 왜 필요하냐 얘기한다. 당신이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왕실, 황실을 얘기하려면 고종황제가 나라를 망쳤던 무능함을 국민들에게 사죄하시오, 그것부터 먼저해야 하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도 직구를 날리는 분도 계신다.
본인들이 원하는 형태의 지식을 갖고 있고 진보, 보수를 얘기하듯이 논조를 만들어 낸다. 저는 그걸 넘자는 얘기를 하는 거다. 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 통일을 내다보는 힘있는 나라의 근본을 다시 돌리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 격변기에 있었던 진보와 보수의 잣대로 대시면 더 이상 얘기가 안된다. 그런 쪽으로 봤을 때는 삶의 형태가 낮아졌다. 사람을 만나면 더 겸손해야하고 왜 이 시대 이런 게 필요한 지 물어보시면 설명을 몇시간씩 해야한다. 그런 과정을 겪다 보니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원래의 직업은 커뮤니케이션 아트,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정말 잘 나갔었다. HBO라는 드라마 채널에서 일했다. 잘나가는 PD였는데 현대전자가 케이블TV를 만든다고 정몽헌 회장이 부르셔서 그분에게 면접보고 뉴미디어 사업본부의 대리로 입사했다. 현대방송 사업권을 따서 현대내 뉴미디어 사업을 진행했다. 현대 홈쇼핑의 방송, 상품본부장을 했다. 어떻게 보면 삶의 질은 그때가 훨씬 높았다.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고 (이구 황세손의) 3년상을 지낸 이후에는 갈등을 겪었고 황사손으로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냐 고민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추구하던 성공의 길은 버렸다.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원래 민족적 자산, 그중 가장 중요했던 최고의 가치관이 모여 있던 왕실문화를 시대에 맞게끔 재발견해 내는 것, 후대의 아이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콘텐츠를 만들어 주는 것 등이다. 만나는 사람의 50%는 아직 (조선왕실에 대해)부정적 시각을 많이 갖고 있다. 원로라고 불려지는 기득권을 가진 분들은 원치 않는 분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제가 바라보는 방향은 교육을 더 받아야 할 우리의 후대들이다. 시대적으로 왜 그때 나라를 뺏길 수 밖에 없었고 다시 뺏기지 않기 위해 어떤 걸 해야할 지 알려주는 것 뿐이다. 그 길을 가려면 결국 문화의 가치를 다시 복원해 그 속에서 재창조해서 소중하고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알려야 한다. 그 얘기를 역사학자처럼 그렇게 가르쳐서는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형태의 시스템과 콘텐츠가 보여야지만 아이들이 잘 흡수하고 잘 받아들일까 연구하고 있다.
남겨진 저의 삶, 인생은 아이들에게,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투자하고 싶다. 제가 만약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았으면 지금보다 나은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저는 40대 후반에 알게 됐다. 아들 둘이 있는데 아들에게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물론 선택은 본인들 몫이다. 자식같은 많은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로 필요로 하는 자들이 운영할 수 있게끔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고 싶다. 학교 형태일수도 있고 프로그램으로도 보여질 수도 있다.
- 황사손 책봉 당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 책봉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받은 것이다. 받을 때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아들로까지 넘겨야 할지는 모르겠다. 마흔 중반에 일본에서 이구 황세손이 갑자기 죽음을 당하셨고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대제를 황실의 적통자 누군가가 지내야 했다. 사가에서도 종손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 종손의 역할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 왔다. 고민할 틈도 없었다. 장례식을 지내고 제사를 지내야 되기 때문에 들어 왔다가 결국은 하나둘씩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직장, 돈, 그 외에 사적인 것으로 원하는 것은 다 버려야 했다. 황사손이 되자마자 3년상을 3년 치르고 1년을 더해 4년은 너무나 고민이 됐다.
-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 다른 사람을 시킬 수는 없었다. 어쨌든 왕실과 황실의 제사이고 세계문화유산인데. 종묘대제는 유네스코에도 등재된 무형문화유산이다. 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묘대제에 오는데 갑자기 황사손이 안하겠다 버리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나. 그것은 우리 정통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저 하나 개인적인 부분 때문에 국가 유산으로 남겨진 부분을 버릴 수 없었다.
- 고종황제 투구와 갑옷 환수 문제가 이슈가 됐었다.
▶대한황실문화원내 문화재환수위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하나가 일본 도쿄박물관에 있는 조선제왕의 투구와 갑옷 건 이었다.
(사)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 공동 대표인 혜문스님, 이상근 대표와 2012년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환수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조선왕실의궤 반환 이후에도 일본에 왕실 관련 국가 문화재가 6만여점 이상 있다는 데 놀라게 됐고 반드시 찾아와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분들과 협의해 환수를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고민했다. 민간단체가 가서 교류를 통한 일도 해야하고 국외소재문화재단과 연계해 해외의 정확한 소재를 파악하고 어떻게 환수할 지 등을 논의해야 했다.
조선왕실의궤 환수 이후에 조선왕실에 있었던 상징적인 문화재는 무엇이냐 확인해 봤다. 조선제왕의 투구와 갑옷이 도쿄박물관에 소장돼 있었다. 오구라라고 하는 일본의 사업가가 콜렉션 개념으로 가져갔다고 하는데 분명히 공식경로가 아닌 불법 유출된 것이다.
조선제왕의 투구와 갑옷인지, 대한제국 설립 이후에 고종황제께서 직접투구와 갑옷을 쓰셨던 것인지 다 조사해야 되기 때문에 3년전부터 일본을 계속 방문했다. 도쿄 박물관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겠다해서 특별열람 신청을 지속적으로 했다. 그것이 3번 정도의 반려를 거쳐 직계손, 고종황제의 증손자,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역사문화를 연구·보존하는 단체인 대한황실문화원의 대표인 이원 황사손이 관람을 한다고 하면 승인토록 하겠다는 과정을 거쳤다. 일본의 중의원 카사이 의원이 도쿄박물관에 지속적으로 요청을 해서 지난해 2월 특별 열람을 하게 됐다. 지난해 10월부터 일반관람까지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각기 일을 하는 단체도 각자 생각이 있고 공동의 목표로 같이 일해야 하는데 각 단체가 갖고 있는 성향이 워낙 강하다. 예를 들면 문화재 환수를 하기 위한 민간단체들이 문화재청의 외부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단과 연계해 각자의 역할을 나눠야 한다. 국가는 철저히 연구해서 환수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만들고 각 민간단체들은 정부를 대신해서 교류하고 설득하고 그것을 하나의 교류의 장의 소재로서 내놓고 열람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연의 장도 만들어 주고 그럼으로써 일본인들도 불법 반출된 것이다는 내용을 알아야 하고 또 찾아오고자 하는 주관단체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지를 알리는 역할이 중요하다.
대한황실문화원도 문화재 환수 단체로 등록해서 국가의 지원을 받고자 했으나 혜문스님 생각은 본인이 시작했으니 본인이 하는 것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분 얘기는 일본에서 쉽게 돌려주지 않을테니까 이슈화하고 전략적인 방법으로서 소송을 통해 갖고 오자는 거다. 휴(한숨)….
고종황제의 투구와 갑옷이 맞으니 소송을 하려면 잃어버렸던 주인, 증손자인 이원 황사손이 원고가 돼서 소송을 하자, 국내법으로는 불가할 것 같으니 미국에서 소송을 하자는 것이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이 맺은 경제협력 우호조약안에 따라 한국이 청구권을 포기했으니 해외문화재를 환수한다는 것은 국내법으로 불가할 것 같다, 그러니 이를 미국의 법원에서 국제법으로 소송을 하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저는 제안 당시 고종황제 투구와 갑옷이 확실하게 도쿄 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도 못했고 조사된 바로는 알고 있지만 거쳐야 될 검증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가가 확실하게 불법 반출된 문화재가 맞다 확인하면 국가와 협업을 하고 국가가 직접 나서서 환수하지 못한다면 민간단체인 대한황실문화원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강구하고 그것에 맞춰 전략을 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송건은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협업이라는 관계에서 혜문스님은 독자적으로 움직이시고 저는 소송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저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 혜문스님이 투구 반환을 혼자 추진하고 있나.
▶ 잘 모르겠다…. 엄연히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대한황실문화원이라는 것이 대한민국 법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법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국내에서 해결이 안된다고 미국에 가서 미국법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는 절대적으로 문화재 환수는 혼자만의 투지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문화재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환수를 위해 대한민국 국민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고 왜 문화재를 환수해야 하는 것인지, 환수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가치를 복원해야 하는 것인 지, 가치를 복원해 후대에게 무엇을 계승해야 하는 것인지다. 이런 부분을 체계적으로 국가가 전략을 세워서 외교적으로 다 하지 못하는 것을 국민의 이해 속에서 사랑과 관심과 정성을 다해 모두 함께 그 과정을 공유하며 환수 문화재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과 자긍심을 회복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선제왕의 투구와 갑옷이 확실하다는 것은 이제 알게 됐고 고종황제께서도 대한제국을 설립하시면서 그 투구와 갑옷을 착복하시고 원구단에서 제향을 올린 것으로 알고 있다. 상당히 뜻깊은 유물이다. 국가의 상징이 일제 강점기때 오구라라고 하는 일본인 사업가가 몰래 훔쳐 나간 반출된 유물이라면 그것은 본래 있었던 나라로 돌려줘야 하는 게 국제법상으로 맞다.
문화재라는 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된다. 우리가 충분히 가치를 알고 국민에게 널리 알려서 국민 한사람 한사람으로부터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그때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그 유물에 대한 의미를 알리고 가치에 대한 것을 국민 교육을 통해 국가가 체계적으로 알려준 상태에서 국가가 직접 외교적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민간인이 서로 모여서 문화교류를 통한 형태로 찾아오는 것이 맞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것을 꼭 송사, 소송, 이슈화해서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과 차이가 있다는 것뿐,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 관련 활동은.
▶ 가장 중요한 게 가치에 대한 회복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이후 대한민국을 설립하면서 일제강점기시 나라에 불충했던 자들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못했다. 한 국가의 국민이 자존감과 자긍감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이 아주 성급히 국가가 설립되면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가치관이 제대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부분들과 역사 속에 있었던 진실은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구한말이라고 하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스스로도 그 역사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정서가 있지만 역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19세기 말, 조선 왕조의 마지막, 그리고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뀐 이후에 1910년 강점되기 전까지 그 역사가 사실은 가장 제대로 알아야하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속에서 그 과정을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세히 알지 못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아하는 과정속에서 제대로 연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기 일본의 위정자들은 120년 전과 똑같은 군국주의 부활을 알리며 미친듯이 날뛰고 있다. 그때 우리는 세계의 탐욕스런 강대국의 이권 나누기 과정속에서 대외 국제외교협력에 실패해 나라를 매국자들 손에 넘기게 됐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속 어느 시기보다 경제력으로 강한 국가가 됐다. 그런데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제강점기, 친일해 부를 축적한 가문은 지금도 막강한 가문으로 승승장구하고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쳐 나라를 되찾겠다 희생한 가문은 망하거나 그 후손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근대 한국의 역사를 안다면 과연 우리 국민의 몇명이나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희생해 나라에 충성할까. 우리는 역사에서 지금을 알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승리한 자가 왜곡한 식민지사관으로 만들어진 역사가 아닌 사실적 조사에 의한 민족적 사관의 역사로 바로 잡아야 한다.
(서울=뉴스1) 염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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