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정신이냐”, “도대체 10년 가까이 뭐하고 있냐”. “돈도 안 되는 걸 붙잡고 뭘 어쩌겠다는 건가.”
미련해 보였다. 무시당하면서 그만큼 욕을 얻어먹었으면, 관둘 법도 했지만 도무지 멈출 기미가 없다. 시중 잣대로, 들어간 돈만 수백억이다. 그러기를 벌써 10년째다. 소문난 인재지만, 우둔하게 한 우물만 파면서 ‘100원의 기적’을 엮어가는 그런 사람이 있다.
권혁일 해피빈(http://happybean.naver.com) 대표는 서울대 선배인 이해진 현 네이버 이사회 의장 등과 함께 포털사이트 네이버를 만든 창립 멤버이자, 검색엔진 개발자 출신이다. 해피빈(네이버 자회사)은 직접 구입한 기부 전용 사이버 머니인 ‘콩’(1개당 100원)을 원하는 단체에 기부하는 세계 유일의 기부 중매 웹사이트다. 물론, 집행 내역은 모두 사이트에 투명하게 공개된다. 권 대표는 2005년 7월부터 해피빈을 운영하고 있다.
해피빈에서 기부한 네티즌이 올해 1월 28일부로, 1000만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누리꾼 4명 중 1명은 해피빈을 통해 기부한 셈이다. 경기도 분당 해피빈 사무실에서 권 대표를 만나 그의 기부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가시밭길의 시작…시행착오 연속
“이젠 해볼 만합니다. 요즘엔 좀 알아보시거든요.(웃음) 휴우~.”
든든한 1000만 지원군을 염두에 둔 탓이었을까. 그는 해피빈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긴 한숨과 함께 허공을 향한 그의 시선은 맨땅에 헤딩했던 1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2002년 NHN(현 네이버) 상장 이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회공헌이었다. 단순 봉사활동에서 벗어나 정보기술(IT)업체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 문화’를 구축해보자는 의미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연히 정(情)에 호소한 게 우리 사회 기부의 전부였다.
“속된말로 한국 사회에선 못먹어서 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방송에 내보내지 않으면 기부 모금이 안됩니다. 정작 중요한 불우 청소년들의 사회적 성장을 돕는 시스템에 기부하자고 하면, 사람들은 인색해지죠.” 그는 먼저 감정에 호소하는 얕은 기부 문화부터 개선시켜야 했다.
경제적인 여유 문제도 있지만 기부금을 집행하는 비영리조직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게 더 시급했다. 기부자를 비영리단체와 직접 연결하고 기부금 내역도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실타래는 풀릴 것처럼 보였다. 그가 온라인 플랫폼으로 ‘해피빈’을 야심차게 오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짧았다.
“해피빈을 한달 동안 운영했는데, 댓글은 고사하고 방문자수 등 반응 자체가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제 생각이 단순했죠. 기부에 뜻이 있는 상위 10~20% 사람들만 모집단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기부에 전혀 무관심한 80~90%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 사람들은 ‘불우이웃을 돕자’고 말하면 ‘내가 불우이웃이다’고 말할 사람들입니다. 기부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죠.” 기부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하게 만들 강력한 노이즈 전략이 필요했다.
◇ 네이버 메일 및 카페 등…기부 알리미 활용
네이버는 해피빈의 도우미로 적격이었다. 당장 네이버의 메일이나 카페, 블로그 등에 글을 쓸 경우, ‘콩’을 받았다는 팝업창 공지를 내보내면서 공격적인 마케팅에 돌입했다. 네티즌들의 반발을 우려한 네이버 실무진 반대도 있었지만, 권 대표의 끈질긴 설득으로 이 전략은 수용됐고 해피빈의 저변도 서서히 확대됐다.
해피빈은 특히, 이 과정에서 기부 충성도를 높이기 위해 네티즌들에게 직접 후원할 비영리단체 선택과 메시지까지 강요하는 과감한 전술도 감행했다.
“클릭 한번만으로 자동 기부되는 원스톱 솔루션 안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프라인과 다른 게 없습니다. 자신이 직접 기부한 대상과 피드백 등을 접하게 하면, 복잡한 과정 때문에 초반 참여율은 떨어질지 몰라도, 기부 진정성을 가진 양질의 네티즌들은 확보할 수 있습니다.” 쉽게 하는 기부는, 그만큼 빨리 지워진다는 게 권 대표의 판단이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초반 다소 부정적이었던 네티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해피빈 사이트에 접속, 자비로 충전하면서 기부를 하고 나섰다. 이런 선행 릴레이는 네티즌들의 입소문을 타고 호평을 얻기 시작, 급기야 지난달 1000만 기부자로 이어졌다.
◇기부 문화도 자생력 갖춘 선순환 구조로 정착돼야
누리꾼들이 몰리자, 해피빈를 바라보던 기업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문전박대했던 기업들이 요즘엔 먼저 제휴 마케팅을 요청하면서 거꾸로 해피빈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제서야 기부의 경제학이 제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네티즌과 기업, 그리고 기부 대상을 연결해주는 메신저(해피빈) 등이 어우러진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어서죠. 기업들이 참여한다면 기부 문화 확산 속도는 훨씬 더 탄력을 받을 수 있거든요.” 기부야말로, 가장 이문이 많이 남는 훌륭한 비즈니스란 점을 기업들도 간파한 것같다고 했다.
해피빈과 손을 잡으려는 업체도 다양하다. 영화나 음악은 물론이고 게임 및 식음료 업체 등까지 해피빈의 ‘콩’을 심겠다고 아우성이다.
이젠 해피빈이 안심 단계에 들어선 건 아닐까. 하지만 권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겨우 첫 단추를 채웠다고 할까요. 아직도 ‘기부는 오지랖 넓은 특정인들이나 하는 선심성 행위’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이상 기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데도 말이죠. 기부가 일상생활이 되는 그날까지 해피빈의 콩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계속 뿌려질 겁니다.” 그의 기부 경제학에 대한 마지막 퍼즐 완성은 국내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 맞춰져 있다.
(서울=뉴스1) 허재경 기자
※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