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잠깐 강원도 춘천 KBS로 전근을 간 적이 있다. 드라마PD가 지역을 갔으니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언젠가는 내 드라마의 무대로 쓸 생각에 호반의 도시, 안개의 도시 곳곳을 즐겼다. "선배, 이 동네 계시는 동안 처신 잘하셔야 합니다."
어느 날 후배가 뜬금없이 말했다.
뜻 맞는 드라마쟁이 몇몇이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중이다. 무리가 모여 궁리를 하려니 회의가 마라톤 회의를 낳고 또 회의(會議)가 회의(懷疑)까지 낳는다. 무기명으로 자유롭게 뱉어놓은 무수한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면 형상화도 어렵다. 생각 끝에 효율을 높이려 기명(記名)회의로 바꾸기로 했다. 기명과 무기명, 기명과 익명은 차이가 많다. 요즈음은 농산품까지도 이것저것 기명 생산품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다. '농부 홍길동이 키운 사과입니다.' '농부 마당쇠가 재배한 포도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거는 각오라면 적어도 거짓말보다는 품질에 신경을 더 쓸 것이다. 몇 년 전 드라마국장을 할 때다. 출근하면 책상 위에 전날 드라마 시청률표가 놓여 있었다. 매일 시험 치르고 성적표 받는 수험생 기분이었다. 시청률에 따라 혈압이 상승 하강하던 어느 날 동네 마켓에서 이름표가 명쾌하게 붙은 농산물을 봤다. 나는 다음날부터 당장 기명회의를 시작했다. 창작분야엔 똑같은 아이디어를 놓고도 의견이 각양각색이고 완전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개개인의 경향과 감각 차이 때문이다. 나름의 논리와 시각으로 반대, 비판하니 나무랄 수도 없거니와 자유로운 의사개진은 매력적인 창작을 위한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기명회의는 자기검증이 어렵다. 수많은 프로젝트가 동시다발로 진행되다보면 누가 어떤 기획을 비판, 옹호했는지 시간이 지나면 본인도 모른다. 성공하면 본인도 그렇게 예측했고 실패하면 자신은 비판했다고 스스로 혼동한다. 기명발언은 자기 진단이 가능하다. 실패든 성공이든 반추해보고 반성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다행히 그 시절 KBS 드라마는 대성공이었다. 이병헌·김태희·정준호가 주연한 '아이리스', 장혁과 이다혜·오지호의 '추노', 문근영의 '신데렐라 언니', 국민드라마로 격찬받은 '제빵왕 김탁구'까지 1년 연속홈런을 친 것은 드라마사에 남을 일이다. 그런 성과가 새로운 회의 덕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기명회의로 노렸던 것은 자기성찰이다. 끝난 후 스스로를 재진단하고 다음 일의 판단에 도움 삼는 일. 아이리스와 김탁구에 반대할 수도 있다. 추노는 경쟁사에서 퇴짜 맞고 온 작품이다. 자기주장과 아집이 반복되면 독단의 우물에 빠져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
드라마 판에만 기명회의가 효용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익명은 자유로움도 생산하지만 무책임과 위험스러운 극단도 생산한다. 일찍이 이문열은 그의 소설 '익명의 섬'을 통해 익명성이 만들어내는 도깨비의 형상을 빛나는 문학적 알레고리로 풀어낸 바 있다. 익명의 사내로 집성촌 주변을 떠돌며 마을의 여러 여인네들과 거미줄 같은 성관계를 맺어가는 '깨칠이', 익명성이 잉태하고 생산한 도깨비다.이응진 문화칼럼니스트 KBS 드라마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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