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가 마흔이 되고 왕위에 등극한 지 30년이 되던 1829년. 효명세자는 순조의 생일(6월18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2월 창경궁에서 ‘진찬’(큰 경사를 맞아 거행되는 궁중연)을 올렸다.
9일 명전전에서 왕과 왕세자 주관으로 조정의 신하들을 초대하는 ‘외진찬’이 열렸고, 12일 자경전에서는 대비와 왕비가 내·외명부 부인들을 대상으로 여는 ‘내진찬’이 열렸다.
185년 전 궁중의 화려한 잔치상이 8일부터 5월25일까지 서울 종로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 재현된다. 다만 주인공은 잔치상의 산해진미가 아니라 ‘궁중채화’다.
‘궁중채화(宮中採花)’는 궁중의 연희나 의례를 장식하기 위해 비단, 모시 등으로 제작한 일종의 조화다.
‘순조기축진찬의궤’에는 명전전 ‘외진찬’에 사용된 채화가 모두 5289송이, 꽃 제작비용으로 632냥7전3푼이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요즘 화폐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50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궁중채화는 왕이 쓰는 기물과 장식품의 제조를 감시하고 수입과 지출을 관장하는 공조서에 예속된 수십 명의 화장(花匠)들이 담당했다.
이번 조선왕실 공예 특별전 ‘아름다운 궁중채화’에서 재현된 잔치상의 ‘궁중채화’ 장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24호인 궁중채화 기능보유자 황수로(78) 동국대 종신석좌교수가 맡았다.
전시실로 들어서면 먼저 임금이 있는 정전 정면의 좌우 기둥 앞에 놓아 연회 장소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홍도화준’(紅碧桃花樽)과 ‘벽도화준’(碧桃花樽)이 관람객을 맞는다.
개막식에 앞서 7일 기자들 앞에 선 황 교수는 “‘궁중채화’는 단순히 궁궐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꽃이기 이전에 왕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고 설명했다.
“‘홍·벽도화준’은 조선 왕의 신성을 나타낸다. 화준에는 조선 왕실의 상징 나무인 오얏 꽃에 날아든 새와 나비, 벌이 담겨 있다. 꽃은 왕을, 새와 곤충은 신하를 의미한다. 군신일체를 상징하는 거다.”
그래서 요즘 태극기를 세우듯 왕이 있는 곳에는 늘 화준이 함께 놓였다고 한다.
‘홍·벽도화준’에 이어 잔치에 빠질 수 없는 궁중 무희들이 돌며 춤을 추는 ‘지당판’이 놓이고 그 뒤로 ‘외진찬’의 잔치상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안으로 들어서면 ‘내진찬’을 따로 재현했다.
‘내진찬’은 ‘외진찬’보다 더 화려했다. 채화 6557송이에 꽃을 만드는 수공비가 모두 1729냥6전3푼, 요즘 돈으로 1억4000만원 정도 들어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내·외명부 여러 종친 부인을 초대하는 ‘내진찬’은 저녁에 열려 ‘야진찬’이라고 했는데 밤에 열다 보니 낮보다 꽃도 더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몄다. 진찬상 채화로는 석류, 포도, 유자 같이 씨가 많은 과일의 꽃을 장식했다. 자손의 번성과 국가의 번영을 꽃으로 표현했다.”
‘궁중채화’에는 머리에 장식하는 ‘잠화’(簪花), 잔칫상에 올리는 ‘상화’(床花), 정재에 장식된 ‘의장화’(儀仗花), 침상 모양의 채색 상 위에 올리는 ‘지당판’(池塘板) 등이 있다.
“채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풀 먹임이다. 풀이 좋지 않으면 꽃이 금방 망가지고 곰팡이가 슬고 벌레가 먹는다. 3년 이상 숙성한 풀을 써야 곰팡이와 벌레가 없고 아름다운 광을 낸다.”
꽃과 열매에서 채취한 염료로 색을 내는 채화는 꿀과 송화가루로 생명을 불어넣는다. 노루털이나 모시털로 만든 꽃 수술에 꽃가루 대신 꿀을 발라 송화가루를 붙인다.
황 교수는 “덕수궁 중화전에서 열린 여름철 야외 전시 때는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 관람객을 놀라게 했다”고 소개했다.
‘순조기축연진찬’을 재현한 이유에 대해 황 교수는 “조선왕조 가운데 가장 많은 채화도와 반차도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바탕으로 화려했던 장엄을 미력하나마 연출했다”고 말했다.
(서울=뉴스1) 박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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