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영국)=최진숙 기자】 8일 오전(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부촌 첼시 지역의 얼스코트 전시장 2층 화이트홀. 1층 중앙에선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한 '2014 런던도서전' 마켓포커스(주빈국) 개막식이 이제 막 끝난 뒤였다. 화이트홀 연단에 앉은 작가 황석영은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그의 옆엔 대담자로 영국의 파키스탄계 여류작가 카밀라 샴지가 앉아 있었다.
"작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무거운 사회자의 질문에 황 작가는 눈을 떠 조용히 마이크를 잡아 끌었다. "나이 들면서 생각은 변한다.
카밀라는 황 작가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았다. "작가들이 자꾸 아픈 역사를 잊으려고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온당한 일인가. 역사를 기억하고 사람들 머릿속에 그걸 심어넣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지 않겠는가." 그는 이렇게 맞섰다.
"적극 동의한다"고 말을 받으면서도 황 작가는 "해외 유명 작가들이 내게 그런 이야길 많이 했다. 할 이야기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좋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작가에게 고통도 심했던 나라라는 말도 된다. 나는 당신들의 자유가 부럽다고 매번 받아친다"고 했다.
이날 오후 전시장 1층 문학살롱관에선 작가 신경숙이 마이크를 잡았다. 영국 인디펜던트 기자 크리스 리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 자리에서 신경숙은 작가 특유의 느릿느릿하지만 명료한 말투로 책 속에 숨겨둔 암호들을 풀어줬다. 그는 3년 전 영어판으로 나온 '엄마를 부탁해'로 영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방청석에 앉은 해외 출판 관계자들 중엔 작가가 답변을 할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 런던은 한국문학으로 들썩들썩하고 있다. 도서전 안에선 황석영, 신경숙 뿐 아니라 이문열, 김영하, 김인숙, 이승우, 김혜순, 한강, 윤태호, 황선미 등 10인의 작가를 집중 조명 중이고, 도서전 바깥에선 한국작가들의 갓 나온 번역서들이 이 콧대 높은 런던 출판계를 술렁이게 하고 있다.
7일 런던 중심부 트래펄가 광장의 대형 서점 워터스톤스엔 한국 작가 작품 두 권이 각 분야 베스트셀러 코너 자리에 진열돼 있었다. 작가 이정명의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The Investigation)'과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둘 다 지난달 말 번역 출간됐지만 벌써 입소문을 탄 모양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이날 오후 런던 차링크로스로드의 헌책방 밀집지역 세실코트 한 서점에선 이정명 작가의 사인회도 있었다. 작가들의 친필사인을 담은 초판본 가치를 아는 서점 주인 데이비드 헤들리가 이 소설을 읽자마자 저자 사인 요청을 했던 것이다.
영국문화원 코르티나 버틀러 문학부장은 "최근 넉달동안 한국책만 읽었다. 20세기 격동의 한국사가 그안에 있었다. 한(恨)으로 불리는 한국의 독특한 세계관을 영어로 느끼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책 읽는 재미가 기막혔다"는 소감을 밝혔다.
런던의 '코리아 물결'은 한국, 한국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호기심과 호감이 그 추동력인 것으로 보인다. 마켓포커스 개막식에 참석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한국을 대하는 영국의 전반적인 태도와 분위기가 과거와 확 달라진 것을 느낀다"며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가난을 극복한 국가이면서 세계인의 손에 들려있는 그 스마트폰을 만들어내는 기적의 나라로 한국을 신비롭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채식주의자' 영문판이 발간돼 주목을 끌었던 소설가 한강은 "대중가요나 영화로 한국을 먼저 만난 영국인들의 관심이 문학으로까지 옮겨가는 중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편,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고영수)가 주관하는 런던도서전 마켓포커스 부스에는 알에이치코리아, 부키 등 한국 출판사들이 대거 참여해 열띤 계약 경쟁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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