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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인근 해상에서 발생했던 이 사건은 기상악화 무시 운항과 정원을 크게 초과하는 무리한 승선 때문에 빚어진 대표적 인재(人災)로 꼽히고 있다.
서해 페리호는 위도와 육지를 왕래하는 여객선이었는데, 운항 초기에는 이용객이 얼마 없어 정부의 보조금 없이는 유지가 어려운 한산한 노선이었다. 그러나 위도가 낚시 명소로 인기를 끌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전국의 낚시꾼들이 위도로 몰려들면서 페리호는 정원 221명을 훌쩍 넘는 승객들을 태워 날랐다.
위도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하루 1회의 운항 횟수를 늘려달라고 정부에 요구했지만 정부에서는 영세업체가 운영하는 여객 노선의 증편을 거부하면서 페리호는 주말마다 정원을 넘어서는 인원을 태운 채 힘겨운 운항을 반복했다.
사고 당일은 일요일이었다. 추석연휴를 마치고 돌아가는 귀경객, 낚시를 마치고 떠나는 관광객들 때문에 정원을 141명이나 초과한 362명의 승객이 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성수기를 맞아 육지에 내다 파는 액젓까지 화물로 실려 페리호의 적재용량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그날 기상상황은 초당 10m 이상의 강풍이 불고, 파도는 3~4m에 달해 선박이 운항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는 게 당시 생존자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페리호는 하루에 단 1회만 운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리한 출항을 감행하게 된다.
이날 오전 9시45분 위도 파장금항을 출발해 격포로 향하던 도중 110t급 서해 페리호는 사고지점에 이르러 갑자기 중심을 잃는다.
화물 적재가 앞부분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한번 균형을 잃자 배는 순식간에 뒤집혀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페리호에 승선했던 승무원 14명을 포함 362명 중 구조된 사람은 70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292명은 사망했다. 사고 발생 직후 인근해역에서 조업을 하던 위도주민들이 60명을 살렸으며, 해군과 해경은 뒤에 도착해 10명을 구조했다. 페리호는 침몰된 이후 8일 만에 인양됐으나 가득 찬 진흙과 바닷물 때문에 크레인이 끊어지면서 다시 침몰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기도 했다.
당시 무리한 화물적재와 정원초과 승선을 허용했던 서해페리사의 간부와 이런 위반 사실을 눈감아 주고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는 수사를 피하기 위해 서류를 파기했던 군산지방해운항만청 직원들은 모두 사법처리됐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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