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대한민국 빛과 소금,공복들] (18) “조국 지킨 영웅의 뼈 한조각 찾아”.. 길 없는 험지·지뢰밭 걷는 그들

장용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6.04 17:46

수정 2014.06.04 17:46

국방부 산하 유해발굴감식단은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을 위해 지난 2007년 활동에 들어가 현재까지 770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해발굴감식단원과 장병들이 지난달 27일 강원 횡성군 학담리의 한 야산에서 발굴한 전사자 유골을 운구하고 있다. 사진=장용진 기자
국방부 산하 유해발굴감식단은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을 위해 지난 2007년 활동에 들어가 현재까지 770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해발굴감식단원과 장병들이 지난달 27일 강원 횡성군 학담리의 한 야산에서 발굴한 전사자 유골을 운구하고 있다. 사진=장용진 기자

【 횡성(강원)=장용진 신아람 기자】 6·25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4주년을 맞았지만 당시 전사한 13만여명의 장병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산야에 잠들어 있다. 이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국방부 산하의 유해발굴감식단. 지난 2007년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착수해 현재까지 약 7년간 7700여구의 유해를 찾았고 이들 중 91명의 신원이 확인돼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조사과와 발굴과, 감식과로 구성돼 조사에서부터 발굴, 신원 확인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파이낸셜뉴스는 유해발굴단의 전사자 탐사 및 발굴 현장을 이틀에 걸쳐 동행 취재했다.

지난 5월 27일 기자가 찾은 강원 횡성군 학담리 무명산 312고지에서는 유해발굴팀원 8명과 11사단 군인 40여명이 한창 유해를 수습하고 있었다. 이곳은 6·25전쟁 당시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현재 일부는 소를 키우는 목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출입금지' 라인이 쳐진 발굴현장에서 팀원들이 전사자 유해 한 구를 조심스럽게 수습했다. 입김과 침이 섞이면 DNA 감식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초여름 날씨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현장에선 두개골 뼛조각과 발뼈를 비롯한 유해와 단추, 탄피, 양말, 전투화 조각 등 유품 10점이 수습됐다. 토양이 습한 곳이라 전투화 안에 있는 양말과 발가락뼈가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였다.

■"매일 험지에 오르지만 사명감 커"

발굴단은 전날 쓰레기 매립지 밑에서 유해 일부를 발견하고 정밀발굴에 들어갔다고 했다. 뼈의 위치로 보아 이 전사자는 웅크린 채 60여년의 세월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부학적 위치는 감식과정에서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주변 노상에서 낙엽 밑에 깔린 다리뼈도 함께 발견됐다고 했다.

발굴작업은 주로 방어하려고 땅을 파서 만든 방공호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발굴팀은 유해를 수습하고 뼈의 위치, 유품 등을 상세히 기록해둔다. 유해는 전통방식으로 입관되고 지역단위로 영결식을 치른 뒤 감식단에 넘겨진다. 발굴팀이 목표로 잡는 발굴 수는 1년에 1000구 정도다.

유해발굴병은 군에서 유해발굴을 주임무로 하는 군인이다. 임무가 가진 의미와 특수성 때문에 인기가 높지만 인력은 부족한 실정이다. 지원자격도 고고학·사학·역사교육학 등 관련 전공을 2년 이상 공부한 자 등에 한정돼 있다. 현재 발굴병 7명과 팀장으로 구성된 발굴팀 8개가 각각 활약하고 있다.

발굴병인 김태민 상병(23)은 사학 전공자로 동아리 선배의 추천을 받아 유해발굴단에 지원했다. 김 상병은 "남겨진 유해를 찾는 것만으로 보람찬 일"이라며 "지난해 한 여성의 사진이 붙어 있는 손거울을 유품으로 발견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현장을 지휘하던 안순찬 발굴팀장(42)은 인근 가리산에서 유해 2구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통 호 200개를 파서 1구 나오면 잘 나오는 건데 오늘 2구나 발견돼 뿌듯하다"고 말했다. 안 팀장은 "전사자의 8촌도 유전자 채취대상에 해당한다. 신원확인을 위해 꼭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유해발굴 위해 제보 절실"

이틀 후인 29일 기자는 유해소재조사팀과 강원 양구군에 위치한 백석산 883고지에 올랐다. 치열한 교전 끝에 1951년 10월 우리 군이 탈환한 이곳은 6.25전쟁의 대표적인 산악전투인 백석산전투가 벌어진 장소다. 조사팀은 전쟁기록과 참전용사의 증언, 지역주민의 제보를 토대로 실제 탐사에 나선다. 발굴할 때는 발굴팀과 지원병력 100여명이 나서기 때문에 사전답사는 필수다.

산을 오르는 동안 독사와 마주쳤고 날벌레가 달려들기도 했다. 길이 없어 잔가지를 헤쳤고 제거되지 않은 지뢰가 터질 수도 있기 때문에 팀원이 밟았던 곳만 따라가야 했다.

"뚜뚜뚜뚜뚜…." 금속탐지기가 강하게 반응하자 탐사관이 다가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정보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냈다. 탄피 8개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탄피통이 나왔다. 발굴팀이 왔을 때 쉽게 장소를 찾을 수 있도록 유품은 그대로 놔둔 채 이동했다.

이날 4시간20여분간 진행된 탐사에서 탄피통 10여개와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 등이 발견됐다. 6·25 전사자가 가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도 열 곳 넘게 찾았다. 격전지로 기록되지 않은 경로에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방공호 200여개가 발견됨에 따라 이곳에서 병력 150여명 정도가 활약했음을 추정케 했다.

이와 같이 유해발굴 과정에서 제보는 필수적이다. 전쟁기록은 '승자의 기록'이어서 역사에 남지 않은 격전지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등산로에서 유해가 종종 발굴되는 만큼 무작정 땅을 팔 수도 없다. 지난해 전국단위로 주요 격전지와 아군과 적군의 행선로를 기록한 유해발굴지도가 제작됐지만 아직 역부족이다. 전쟁이 발생한 지 1년여 지난 후에야 인식표(군번줄)가 지급됐기 때문에 신원확인도 쉽지 않다. '열 번의 제보 중 한 번만이라도 확인되면 대성공'이라는 관계자의 말처럼 제보는 많을수록 좋다.

유해발굴단 이용석 조사과장(57)은 증언 수집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조 과장은 "'저어기 있다'고 하고 다른 곳을 보거나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분들이 있다.

전쟁 당시 북한군에 부역했던 분들이 자손에게 피해 갈까봐 눈치만 보고 알면서도 말을 못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는 "부역자 처벌법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도 당시에 많은 고초를 당해 아직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마음의 상처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ohngbear@fnnews.com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