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은평구, 항일 태극기 전시...4월30일까지

김두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2.19 09:37

수정 2015.02.19 09:37

설날 아침에 읽는 독립운동의 이야기

지방기초단체인 서울 은평구가 광복 70년 3·1절을 맞아 독립운동과 항일 시절 태극기를 재 조명한다.

김우영 은평구청장은 오는 25일부터 은평역사한옥박물관(관장 황평우)에서 '광복 70년! 미래천녀! 진관사·강릉 선교장의 독립운동 태극기'전을 연다고 19일 밝혔다. 독립운동 태극기전은 4월30일까지 열린다. 이들 태극기는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와 한국 최대 한옥인 강릉 선교장에서 각각 발견됐다.

진관사 태극기는 2009년 발굴돼 근대문화재 제458호로 등록됐다. 당시 진관사에서 태극기와 항일독립신문들이 발굴됐다.
또 강릉 선교장 태극기는 2014년 발견돼 문화재 등록을 준비중이다. 이번 전시때 '강릉 선교장 태극기'와 김구 선생의 '天君泰然(천군태연)' 휘호도 만나볼 수 있다.

김 구청장은 "이번 전시는 광복 70년, 독립운동과 태극기의 진정한 의미를 되짚어보는 전시가 될 것이다. 또 진관사와 강릉 선교장을 통해 우리 한옥이 가지는 공간구조의 특징과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진관사 태극기', 조선민중의 용기와 기개 드러나

'진관사 태극기'는 서슬퍼런 일제강점기때, 일장기(日章旗)에 태극을 그려넣은 조선민중의 강단있는 용기와 기개를 표현했다.

진관사는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이곳에서 2009년 진관사 칠성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3호) 해체 복원 조사 중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항일 태극기가 발견됐다. 이 태극기는 오랜 세월속에 변색했으며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되었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 크기는 가로 89㎝, 세로 70㎝, 태극의 직경은 32㎝이다. 이 태극기의 4괘는 현재의 국기와 비교하면 리·감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이는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과 동일하다.

태극은 청·적색이고, 현재의 국기를 뒤집어 놓은 모습이다.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 독립운동 현장에 쓰였던 태극기로 보이며 우연히 발견되기 까지 9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벽 속에 숨겨져 있었다. 진관사 독립운동 유물의 발견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독립의지와 항일투쟁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진관사 태극기는 여러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사찰에서 태극기 발견은 현재까지 진관사가 유일하다. 이때 진관사에서 항일독립운동 신문도 같이 발굴됐다. 일제강점기 한국불교계 항일운동의 자취를 보여 주는 생생한 자료이다. 특히 사찰에서도 인적이 드문 칠성각에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점은 당시 불교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던 항일운동이 얼마나 절박하게 전개되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다고 은평구는 설명하고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태극기는 일장기위에 덧그려졌다는 점이다. 이는 일장기를 거부하고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 태극기 속에는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발간된 지하신문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간행된 신문이 둘둘 말린 채로 함께 발견됐다.

신문은 '신대한(新大韓)' 3점, '독립신문(獨立新聞)' 2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3점, '경고문(警告文) 1점이다. 이들은 모두 태극기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발견된 독립신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발행했으며 이 신문 제30호에는 시 '태극기'가 있고, 제32호에는 태극기의 의미와 제작법을 제시한 '태극국기신설(太極國旗新說)'이 게재됐다. 진관사 태극기 제작 방식은 이 지침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19년 6월의 경고문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편에 선 세력들이 벌인 '자치운동' 등에 대해 엄중 경고하고 항일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격문의 말미에 실린 '萬歲(만세)'를 부르짖는 표어는 태극기가 교차된 그림으로 장식됐는데 진관사 태극기의 4괘와 모양이 동일하다. 이밖에 신문도 태극기의 도안을 싣고 있거나 태극기 게양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재조명되는 은평의 독립운동가 백초월 승려

그렇다면 누가 칠성각의 기둥 사이에 태극기를 숨겨놓았을까. 이 물음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승려 백초월(白初月)이다. 그는 1878년에 경남 고성에서 출생해 1944년 6월에 생을 마감했다. 14세때 영원사로 입산, 출가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불교계 민족대표인 한용운 선생을 대신해 불교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백초월은 국내와 임시정부를 왕래하던 항일승려들을 진관사에서 만나고, 불교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그는 진관사와 진관사 마포포교당을 근거지로 삼고, 전국 사찰을 왕래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백초월은 진관사에서 보살계 법회를 통해 군자금의 모금, 제2의 3·1운동 추진, 임정의 독립신문과 비밀 지하신문을 배포했다. 진관사 태극기는 함께 발견된 신문류의 발간일을 놓고 볼 때 그가 진관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919년 숨겨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비밀단체인 '일심회(一心會)'를 결성했으며 불교 교리와 민족의식을 전달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후 백초월은 1939년 철도국의 노동자 박수남이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를 쓴, 이른바 '용산역 낙서사건'의 배후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간 구속당했다. 출옥 후에도 임정에 군자금을 보내다가 체포, 옥고를 치르다 1944년 6월 청주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90년 백초월의 독립유공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번 전시에는 백초월의 '칠언시'와 '묵죽도' 등 서예 작품 7점도 전시된다.

■강릉 선교장 태극기 최초 공개

국내 최대 한옥인 강릉 선교장의 태극기는 구한말인 1891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로 154cm, 세로 142cm 크기의 대형 태극기다. 이 태극기는 고종황제가 하사했거나 이강백 강릉 선교장 관장의 증조부인 이근우 옹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태극기는 1908년 강릉 선교장 내 동진학교에서 사용됐던 2개의 태극기 중 하나로,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은 후 광복될 때까지 땅속에 묻어뒀다가 광복이 되자 하나는 임시정부에 기증했고, 남은 하나를 강릉 선교장에서 보관해 오다 최근 공개했다. 실제 이 태극기는 동진학교의 기념사진에도 남아있는 유서 깊은 태극기다. 이 태극기는 현재 등록문화재 지정이 예고되어 있으며, 외부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강릉 선교장에 내린 김구의 '天君泰然(천군태연)' 휘호

이 휘호는 광복 후 귀국한 백범(白凡) 김구선생이 73세이던 1948년 4월, 당시 강릉 선교장 주인이던 이돈의 선생에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남몰래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것을 치하하는 뜻으로 보낸 것이다. 당시 김구 선생에게 많은 사람들이 독립군 자금을 보낸 것에 대해 생색을 내며 이야기했으나 유독 강릉 선교장만큼은 아무런 소식이 없자, 김구 선생이 고마운 마음에 먼저 선물로 이 휘호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天君(천군)은 '사람의 마음', '泰然(태연)'은 '머뭇거림이나 두려워함 없는 기색'을 뜻하는 말로 '남에게 행한 의로운 행동이나 행위에 대해 나대거나 자랑하지 않는 선비의 의연한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즉 막대한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고도 생색내지 아니한 큰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백범의 휘호는 떨림이 강하나, 이 휘호는 지병이 오기 전에 쓴 것으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종이에 힘찬 필체로 적혀 있어 기상이 넘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휘호는 1962년 도난당했고 최근 경매시장에 나왔다가, 52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강릉 선교장으로 돌아왔다. 백범이 강릉 선교장에 보낸 또 하나의 친필 휘호 '天下爲公(천하위공)'은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
이 휘호 역시 속히 돌아오기를 염원한다.

이밖에도 안익태의 '코리아 심포니' 친필 악보도 전시된다.
이 악보는 숭실고등학교 100주년 행사 때 안익태 선생의 부인인 로리타 탈라벨라 여사가 숭실고에 직접 전달했다. dikim@fnnews.com 김두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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