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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대학로는 죽었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3.23 17:20

수정 2015.03.23 17:20

[기자수첩] 대학로는 죽었다

초등학생 시절인 지난 1996년 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처음으로 봤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오페라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한 어린이 음악극이었다. 서울 동숭동 바탕골소극장에서였다. 200석이 채 안 되는 공간에 엄마 손잡고 온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악당에게 납치 당한 파미나 공주를 찾아 타미노 왕자가 밤의 여왕이 준 마술피리를 지니고 떠나는 모험과 마지막 반전은 어린 관객들에게 엄청난 흥분을 안겨줬다. 세상에서 가장 부르기 어렵다는 오페라 아리아의 하나로 불리는 '밤의 여왕 아리아'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며칠이나 귓가를 맴돌았다.


'마술피리'뿐만이 아니라 명작을 명작인 줄도 모르고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맞은편에 있던 샘터파랑새극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극장의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할까 하는 고민부터 소극장에 가는 매주 토요일을 기다리던 설렘까지, 벅찬 행복이었다. 조금 더 커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탕골소극장(1986년 개관)과 샘터파랑새극장(1984년 개관)은 대학로 연극 시대의 초석이 됐던 극장들이었다.

지난 11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꽃상여가 등장했다. 연극인 150여명이 "대학로는 오늘 죽었다"고 선언했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폐관 위기에 놓인 '대학로극장'(1987년 개관)을 살려야 한다는 취지의 퍼포먼스였다. 1990년대 창작극 '불 좀 꺼주세요'로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극장이다. 하지만 상권이 커지고 부동산 값이 뛰면서 치솟는 임대료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는 대학로극장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이날 연극인들은 "대학로의 소극장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있다. 소극장 덕분에 살아난 대학로가 오히려 연극인들을 몰아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004년 정부가 대학로를 문화지구로 정해 건물주에게 여러 혜택이 돌아갔지만 오히려 소극장은 죽이는 꼴이 됐다는 항변도 수긍이 간다. 돈을 벌어주는 자극적인 소재의 연극이 판을 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바탕골소극장의 안부가 문득 걱정됐다. 10여년 전부터 부동산중개업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 '로코(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연극이 장기공연 중이었다.
"대관료만 받으면 그만이지 어떤 연극이 공연되는지는 관심없다"는 극장 관계자의 말이 섬뜩했다. 이러다 한국 공연예술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대학로 곳곳에서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로코'를 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로코'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 될 수는 없지 않겠나.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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