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스릴러라 고른 건 아니에요. 시나리오가 쫀쫀하고 긴장감 있어서 선택했죠. 스릴러든, 코미디든 최선을 다할뿐입니다.
한때는 푸근한 옆집 아저씨였다. 순박한 외모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을 구수하게 부르던 남자 '주정남'. 그러던 아저씨가 어느날 갑자기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형사 '백홍석'이 되어 나타났다. 붉게 충혈된 눈 속에 온갖 복잡한 감정들을 담아, 지켜보는 사람마저 괴롭게 만들었던 남자. 모두 한 사람, 배우 손현주(사진)의 모습이다. 그가 또 다시 형사가 되어 나타났다.
새 영화 '악의 연대기' 최창식 반장으로 돌아온 손·현·주… 자신이 죽인 살인사건 수사 맡으며 피말리는 두뇌싸움 시작되는데..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손현주를 만났다. 으레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연신 인사를 하며 등장했다. 그래, 손현주가 원래 저런 모습이었지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첫사랑'의 주정남이 드라마 '추적자'의 백홍석이 되기까지, 환골탈태 수준의 이미지 변신 과정을 인지했던 기억이 없다. 마치 처음부터 범죄 스릴러물을 위해 태어난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처럼, 푸근했던 주정남 아미지는 어느 순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 그는 가장 큰 전환점이 됐던 드라마 '추적자' 얘기부터 꺼냈다.
"'추적자'는 라인업이 잡혀 있던 작품이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관심도가 적었고 캐스팅도 급하게 했죠. 영화 '숨바꼭질'도 마찬가지예요. 예산도, 관심도 적었던 영화죠. 게다가 '미스터 고' '감기' '더 테러 라이브' 같이 예산이 큰 영화들과 경쟁해야 했어요. 그렇게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원래 더 죽기살기로 열심히 하게 돼요."
지난 2013년 손현주가 첫 주연을 맡은 영화 '숨바꼭질'은 560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스릴러 영화 사상 최대 흥행기록을 썼다. 범죄 스릴러물의 주연배우로 이미지를 굳혀준 작품이기도 하다. 14일 개봉하는 '악의 연대기'는 그가 2년 만에 선택한 두번째 스릴러다.
"꼭 스릴러물이어서 고른 건 아니에요. 손현주가 이 역을 맡아 어떻게 바뀔 것이다, 이런 생각도 없었어요. 시나리오가 쫀쫀하고, 긴장감 있고, 재밌을 것 같아 선택한게 커요."
'악의 연대기'는 최창식 반장(손현주 분)이 자신을 납치해 살해하려던 남자를 몸싸움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살해하면서 시작된다. 정당방위였지만 특급 승진을 앞둔 그는 서둘러 사건을 은폐하고 자리를 뜬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그가 죽인 시체가 최반장의 경찰서 앞에 있는 공사장 크레인에 매달린 채 전국에 공개되고 최반장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수사를 직접 맡는다. 수사망은 점차 좁혀오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최반장은 피말리는 두뇌싸움을 시작한다.
특이하게도 '악의 연대기'에는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없다. 모두 어쩔 수 없이 악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너무 납득할 수 있어서 도리어 괴롭다.
"괴로운 일에 처했는데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덮고 싶은 과거는 누구나 있을 거예요. 관객들이 스스로를 한번쯤 돌아볼 수 있는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어느날 갑자기 스타급 주연배우, 흥행 보증수표가 됐다. 마흔이 넘어 맞은 전성기다. 달라진 건 뭐가 있는지 물었지만 그는 고개만 갸우뚱할 뿐 끝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다보니 이렇게 왔고 내일 일은 또 모르죠. 코미디가 됐건, 스릴러가 됐건 최선을 다해 할 뿐이예요. 전성기가 온게 아니라 할 수 있을 때에 할 만한 작품들이 온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초반에 이런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면 감당하지도 못했겠죠."
사람 좋게 웃던 그의 눈이 순식간에 바뀐 순간이 있었다. '스타병'에 걸린 연기자들 얘기가 나왔던 순간이다. 눈빛이 강해지며 눈 주위가 붉게 변하는, 최반장 눈빛이었다.
"남의 주머니에서 단돈 1000원이라도 빼먹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가짐을 본인 우선으로 두면 안돼요. 처음부터 스타가 어딨어요. 누가 '제발 연기해주세요'하고 빌어서 배우를 시작하나요. 다 본인이 좋아 선택한거지. 관객도 손님이라는 생각을 해야 해요. 그걸 못하겠으면 하지 말아야지."
그는 스스로에게 '스타'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두렵다고 했다. "국민배우 이런 타이틀은 제발 안붙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감히 국민배우야. 그냥 배우, 연기자 그렇게 끝까지 가고 싶어요." 허허 웃는 모습은 다시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 손현주로 돌아와 있었다.
seilee@fnnews.com 이세경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