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꾼 한글 패션
한글을 그림으로 알던 외국인에 한글 서체의 아름다움 알려 뉴욕·런던 박물관에 전시 IMF 라가르드 총재도 직접 찾아
작년 불거진 열정페이 논란
"후배들의 꿈 희생돼선 안돼 체계적인 관리방법 찾고 있어"
"창조적인 제품을 제시하는 크리에이터(Creator)와 장인에 가까울 정도로 몇십년 동안 파고드는 명장은 기준이 다르다. 그 기준이 어디쯤인지 알 길은 없지만 완벽한 지휘자같이 최고의 옷을 만드는 명장이 되고 싶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을 위해 '디자이너 이상봉'이 존재할 수 있었다. 팔리는 옷에만 집중했다면 이 자리까지 이어가긴 어려웠을 거다. 팔리든 안팔리든 내가 디자인하고 싶은 옷들을 만들면서 시대를 잘 이해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전달할 줄 아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올해 이상봉 디자이너의 브랜드 '이상봉'이 3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85년 브랜드 '이상봉' 설립 이후 대표로 현재까지 한국에서 현존하는 패션디자이너 가운데 가장 많은 컬렉션을 치렀다. 이상봉 디자이너는 지난 2002년부터 2013년까지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서 프랑스를 무대로 한국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렸다. 이어 지난해부터는 뉴욕패션위크에도 참가하면서 뉴욕 맨해튼에 이상봉 단독숍도 오픈했다.
그는 팔리기 위한 소비지향적인 패션이 아니라 한국 디자이너로서 한국인의 감성을 담아 의상을 제작했다. 한글 패션을 통해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큰 몫을 해냈다. 최근 그는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CFDK) 회장직을 2년간 연임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어야 했다.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 디자이너로서 감내해야 하는 성장통도 겪었다.
지난주 인터뷰 당시 오전 병원에서 링거를 맞은 손등의 반창고를 떼어내며 이상봉 디자이너는 '영혼이 많이 지쳤다'는 말을 시작으로 입을 열었다. 명예에 대한 욕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모래성을 지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고 한다. 30년 넘게 패션에 대한 열정만으로 이겨내온 만큼 그의 눈엔 확신이 차있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패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지만 학교 졸업 이후 일반회사 생활을 잠시 했었다. 지나가는 친구의 말이 '의상실이나 수선집을 하면 그래도 벌이가 괜찮다더라'는 말에 무작정 당시 서울국제복장학원(현 국제패션디자인직업전문학교)에 등록했다. 이후 1980년 패션 디자이너로 입문하기까지 그곳에서 패션의 기본기를 닦았다. 서울국제복장학원은 고(故) 최경자 선생님께서 설립한 국내 최초 패션교육학교로, 고인이 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비롯해 50만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금까지도 인생에서 단 한 명의 스승을 꼽으라면 '최경자 스승님'을 꼽을 수 있다.
―이상봉 디자이너 하면 '한글 디자인'이 떠오른다. 한글 패션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이끌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한글 디자인은 내 인생을 바꾼 작업 가운데 하나다. 한국인으로서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시작했지만 한글 디자인 작업은 정말 힘들었다. 당시 내부에서도 판매로 이어질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반대가 심했다. 해외에 처음 나갔을 때 태극기 대신 인공기가 걸려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에 대한 해외 인지도가 떨어졌다. 당시 독일에서 전시회에 나갔을 때도 바이어들이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라는 말만 들어도 외면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2003년 화려한 단청과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무속신앙을 문화로 승화시킨 '샤머니즘'을 컬렉션에 녹여 선보인 이후 외국에서 반응이 놀라웠다.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한글 병풍을 배로 파리 샹젤리제 근처 숍으로 보내 한글 의상을 소개하기도 하고. 2005년 9월 파리 전시 때부터 한글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프랑스 파리 현지 언론에서도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한글 디자인 의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글을 그림으로만 인지하던 외국인들이 한글 서체의 아름다움을 알게되면서, 뉴욕 FIT박물관을 비롯해 영국 빅토리아알버트뮤지엄 등 세계에 한글과 단청 의상이 전시되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한글 패션에 감동을 받아 관심을 갖고 찾기도 했다.
―지난 2013년 출간한 저서 'Fashion is Passion'에서 이상봉 디자이너 본인을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기술했는데.
▲사실이다. 명예에 집착하는 편이 아니다. 처음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나갈 때는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때뿐이었다. 한글 디자인을 하면서 많이 내려놨다. 지난 1985년 이상봉을 설립하고 10년이 넘게 외환위기 전까지는 회사 운영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경영에 '꽝'이었지만 이제는 실질적으로 나서려고 한다. 지난해부터 불거진 '열정페이' 논란도 그렇다. 기회를 제공했으나 방법론적인 관리를 못해줬다면 앞으로 체계적인 관리를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앞장서서 찾아야 한다. 이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이다. 디자이너가 되길 희망하는 이들의 꿈이 희생돼서도 안된다. 어떻게든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이번 현안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문제점을 제기했던 친구들과 계속 소통하며 방법을 찾아갈 계획이다. 사실 오늘 오후에도 만나기로 했다.
―'K패션'에 대한 해외 관심이 뜨겁다. 그러나 일각에선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냉소적 시각도 있다.
▲한류에 대한 긍지를 크게 느끼고 있다. 지난 2000년대 초반 한류가 처음 일었을 당시, 사람들은 한두 편의 인기 드라마 영향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어떤가. 한국 드라마로 시작된 한류가 K팝으로 번져 가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한류는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올해만 봐도 패션업계에는 세계적인 브랜드들의 행사가 이뤄졌다. 디올과 루이비통이 각각 서울 광화문과 동대문에서 전시를 했다. 지난 5월 진행된 샤넬 크루즈쇼가 한국에서 펼쳐졌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있었나. 이제는 다르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서울이 아시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성공하면 아시아에 알려진다'는 사실을 세계가 인지하고 있다. 패션의 대중화·산업화·세계화 가운데 한국의 패션을 문화에서 산업으로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가 패션산업으로 연결돼 글로벌 패션에 견줄 수 있는 의상과 디자이너들이 더 많이 배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디자이너 혼자서 일궈가기엔 한계가 있다.
―아들 이청청 디자이너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청청 디자이너에게 아버지로서 역할은 부족했지만 선배로서 역할은 하려고 노력한다.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다. 이청청 디자이너와 일에 있어선 철저히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청청 디자이너와 같은 2세 디자이너들이 배경에 대한 오해와 불필요한 질문들을 수없이 받아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30년간 이어온 '이상봉' 브랜드도 꼭 내 자식이어야만 물려준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이상봉' 브랜드에 맞는 한국인 디자이너가 나타난다면 기꺼이 내어줄 생각이다. 아직 한국에서는 브랜드가 세대를 넘어가면서 이어가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작업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청청 디자이너의 브랜드 '라이(LIE)'는 오롯이 이청청 디자이너의 브랜드다. 시대가 변하면 내 기준이 아닌 다음 세대의 기준으로 세상을 읽듯이 디자이너도 변한다. 마찬가지로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세계에 따라 옷도 달라진다. 이상봉 브랜드가 노련함을 지녔다면 이청청 디자이너의 브랜드는 신선함이다. 단지 내 생각을 던져주고 그걸 자유롭게 받아들이든 말든 그건 이청청 디자이너의 몫이다. 내가 갖고 있는 잣대로 남의 옷을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칫 남의 인생에 대한 책임이란 생각도 들어 평가는 조심하려 한다. 디자인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세계를 인정해주고, 그 디자이너의 장점을 알아주는 게 중요하다. 옷에 대한 평가는 소비자와 바이어, 그리고 프레스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조언한다면.
▲누구나 자기 시대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세대는 우리 시대를 얘기했고, 지금 세대는 지금 시대를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 현실에선 그 시대를 잘 이해하는 젊은 감성의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옷에 대한 애정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정신을 유지하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기대하고 있다. 시대에 맞는 디자이너가 되는 게 현실에서는 가장 중요하지만 그 작업에 아름다운 정신을 담았으면 좋겠다. 요즘 느끼는 점이 있다면 세상에 비겁하지 않는 것.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답이 있다. 단지 그 이유와 변명에 대해 내 자신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려고 스스로도 노력하고 있다. 그걸 실천하는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철학보다는 본질인 정신을 디자인에 담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 디자이너 가운데 가장 많은 쇼를 진행했다. 앞으로 다른 새로운 분야를 시도한다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160회가 넘는 패션쇼를 진행했다. 기업이 주최하는 쇼를 비롯해 문화적인 쇼, 개인적인 퍼포먼스 등 기록하기 어려울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해왔다. 연극을 전공해서인지 이상봉 패션쇼는 메시지 전달이 명확했다. 예를 들면 외환위기 당시에는 모델들이 맨발로 해골이 옷을 입은 듯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패션쇼가 한동안 문화적인 요소로 작용했지만 사회적인 메시지 전달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gloriakim@fnnews.com 김문희 기자
■이상봉 약력 △서울 송곡고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학과 △1985년 (주)이상봉 설립 △1999년 '올해의 디자이너' 서울시장 상 △2006년 프랑스 파리 '후즈넥스트(Who's Next)' 한글 패션 전시 △2006년 프랑스 파리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 갈라 전시 기획 및 참가 △2009년 '올해의 디자이너' 대통령 표창 △2010년 행남자기 이상봉 에디션 론칭(영국 런던 V&A 박물관에 영구전시) △2010년 한국-러시아 수교 20주년 기념 모스크바 패션 쇼 △2011년 '프리미엄 코리아(Premium Korea)' 영국 런던 헤러즈백화점 전시 △2011년 ISU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김연아선수 프리의상 디자인 △2011년 에스모드 베를린 심사위원 △2012년 영국 런던올림픽 기념 '코리아 샤이닝 브라이트(Korea Shining Bright)' 패션쇼(빅토리아앤알버트뮤지엄)△2013년 한국·스위스 수교 50주년 기념 K-Style In The World 패션쇼(스위스 취리히) △2002~2013년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2012년~현재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CFDK) 회장 △1994년~현재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2014년~현재 뉴욕패션위크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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