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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7) 바둑계 살아있는 전설 조훈현

國手조훈현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면, 그것으로 이긴 것이다"

다섯살, 바둑과 만나다
목포 재벌집 자식이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후 바둑을 두기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기원에 다녔다.

나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
그 분은 제자들에게 바둑보다 당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줬고, 인격을 배우게 하셨다. 그 분의 정신세계는 아직도 내 안에 흐르고 있다.

1989년 9월, 역사적 한수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의 고수를 누르고 승리했다. 최후의 한수를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답을 찾은 게 아니라 생각이 답을 찾아냈다.

패배가 가르쳐 준 것
전성기는 짧았다. 열다섯살 제자 이창호에게 타이틀을 하나씩 내줬다. 올라갈 땐 정상만 보였다. 내려오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도 질 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고수에게 다시 바둑을 묻다
바둑은 체력이다. 아무리 관록이 깊어도 젊음을 이길 수 없다. 나는 아직 현역이다. 그만둘 이유가 없다. 바둑이 100이라면 이제 고작 2~3을 아는 것 같다. 예전엔 이기기 위해 뒀다면 이젠 바둑이 좋아 둔다.

국내 모든 타이틀을 차지하며 한국 바둑계를 평정했던 조훈현 국수는 "예전엔 이기기 위해 뒀다면 이젠 바둑이 좋아서 둔다"며 "고수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예의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박범준 기자
국내 모든 타이틀을 차지하며 한국 바둑계를 평정했던 조훈현 국수는 "예전엔 이기기 위해 뒀다면 이젠 바둑이 좋아서 둔다"며 "고수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예의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박범준 기자

바둑의 총량이 100이라면 이제 겨우 2~3을 깨우쳤다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수(國手)'다. 바둑의 실력이 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최고령, 예순일곱 나이에 왕좌전에 오른 일본의 후지사와 명인은 바둑을 얼마나 아느냐는 물음에 "100 중에 6~7밖에 모른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말에 한국의 국수가 웃었다. "6~7이면 엄청 많이 아시는 거죠. 나는 고작 2~3밖에 모르겠는데." 국수 조훈현(62)을 서울 평창동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바둑계에서 그는 '살아있는 역사'다. 아직도 깨지지 않은, 세계 최연소인 아홉살에 바둑 프로기사로 입문했고 세계 최다승(1938승), 세계 최다 우승(160회) 기록을 보유해 '전설의 승부사'로 불린다. 그리고 50년이 흘러 백발이 성성한 지금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바둑은 어떻게 처음 접했나.

▲할아버지가 전남 목포에서 소위 재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3남 중 막내였는데 아들 셋을 모두 일본으로 유학 보낼 능력이 있을 만큼 풍족한 집안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아버지가 바둑을 알게 됐다. 내가 태어나고 전쟁통에 제주도로 피란을 가고 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할 일이 없어지다보니 바둑을 두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기원을 다녔다.

―몇 살부턴가.

▲다섯살 무렵이다. 어린애가 바둑을 둔다고 하니 할아버지들이 귀엽다고 매일 바둑을 두자고 했다. 지겨워서 두다 말고 도망가면 그런 나를 붙잡으려고 용돈도 주고, 과자도 사줬다. 과자 먹고 한 수 두고, 100원 용돈 받으면 두 수 두고 하면서 점차 실력이 늘었다.

―신동이었나.

▲그랬던 것 같다. 당시 바둑은 일본의 정석을 많이 따랐는데 나는 단지 이기기 위해 내 멋대로 두다보니 어른들이 당해내질 못했다. 만 여섯살이 됐을 때 재주가 있으니 서울서 가르쳐보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무작정 서울로 이사를 왔다.

열살이 되던 해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의 세고에 겐사쿠 명인의 내제자(스승의 집에서 동거하며 바둑을 배우는 제자)가 된다. 열여덟살 군 입대를 위해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세고에의 마지막 내제자로 9년을 함께 살았다. 한국말을 모두 잊어버릴 만큼 긴 시간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다. 바둑이 그렇게 좋았나.

▲바둑이 좋고 나쁘고를 생각해 본 적 없다. 바둑을 제일 잘해서 갔고, 제일 잘 두려고 갔다. 오로지 바둑만이 내 길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본어도 배워야 하고, 바둑도 배워야 해서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다.

―스승은 어떤 분인가.

▲나를 포함해 단 세 명의 제자를 받으셨고 모두 일류로 키워내셨다. 그분은 9년 동안 바둑은 물론 바둑을 대하는 자세, 그 정신세계까지 주셨다. 앞에 앉혀놓고 일일이 가르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 당신의 인성, 인품, 인격을 늘 보여주면서 제자가 보고 배우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스며든 그분의 정신세계는 지금도 내 안에 흐르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80년부터 국내 기전을 전부 휩쓸며 1986년까지 세 차례나 한국기전 전관왕에 올랐다. 최고 11관왕까지 국내 모든 타이틀은 전부 조훈현의 차지였다. 그리고 1989년 9월, 한국 바둑 70년 역사상 최고의 사건을 만든다. 세계 프로바둑선수권 대회인 제1회 응창기배에 진출, 중국의 고수 녜웨이핑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조훈현이 거둔 승리는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릴 뿐 아니라 변방으로 평가받던 한국 바둑을 단숨에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날 조훈현과 녜웨이핑의 결승 기보(바둑을 둔 내용을 기록한 것)는 인기 드라마 '미생'의 원작 웹툰에도 등장한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7) 바둑계 살아있는 전설 조훈현


―승리를 만든 최후의 한 수를 기억하나.

▲상대는 잔펀치를 날리다 마지막 KO펀치를 날리려고 하는 중이었고, 나는 잔펀치를 맞다가 정신을 번뜩 차린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다. 죽기 살기로 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최후의 한 수가 보였다. 어떻게 생각이 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내가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최근 발간한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고요한 생각의 결 안으로 들어갔다. 거칠었던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조바심도, 초조함도, 이기고 싶어하는 욕망도 사라졌다. 바둑과 나, 단 둘만 남았다. 그 절대적인 고요의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불과 5개월 후 열린 제29기 최고위전에서 43세의 조훈현은 15세의 제자 이창호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준다. 1984년 내제자로 그를 받아들인 지 6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이후 5년 동안 이창호는 조훈현이 가졌던 모든 타이틀을 하나씩 가져갔다. 1995년 2월, 마지막 남은 대왕 타이틀을 빼앗기던 날, 그는 20년 만에 무관 신세로 전락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무관 신세가 돼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했다. 정상에 오를 때는 정상만 보며 올랐고, 오르기만 하다보니 진다는 걸 몰랐다. 하나둘씩 뺏길 때는 불안에 떨었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잃을 게 없으니 오히려 편해졌던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나.

▲아무리 해도 못 이기는 걸 속상해하면 뭐하나. 그때부터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받아들였다. 어차피 지는데 한 번이라도 이겨보자. 열 번 지는 건 당연한 거고 한 번 이기면 득이라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니 편안해지고 엔도르핀이 도니 체력도 좋아졌다. 자연스레 경기도 잘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더 열심히 대회에 참가했다. 1996년에는 사흘에 한 번꼴로 대회에 나갔다. 수없이 지면서도 웃음이 많아졌다. 그리고 1998년 국수전에서 다시 이창호를 만나 그를 꺾는다. 조훈현은 자신의 책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창호를 이기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다시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물론 정상에 올라도 곧 떨어질 수 있는 운명이지만, 적어도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는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증명해 보였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그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포트라이트가 모두 사라진 곳에서 전설은 여전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예전에 이기기 위해 뒀다면, 이제는 바둑이 좋아서 둔다. 그는 "고수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예의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창간 15주년/대한민국 명장열전] (7) 바둑계 살아있는 전설 조훈현


―바둑은 체력 싸움이라고 들었다.

▲체력이 있어야 정신력이 따라온다. 그래서 바둑은 아무리 경험과 관록의 깊이가 깊다 해도 젊음을 이길 수가 없다.

―은퇴할 생각은 없나.

▲왜 그만둬야 하나. 나는 아직 선수다. 우승을 못해 관심을 받지 못할 뿐 누구보다 열심히 바둑을 두고 있다. 바둑은 자신이 원하면 언제까지고 계속 활동할 수 있는 스포츠다. 이제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해야 할 일, 걸어야 할 길을 최선을 다해 갈 뿐이다.

―60년 바둑을 둬보니 어떤가.

▲처음 배울 때는 알 것 같았고, 점점 더 깨우칠 때는 다 아는 것 같지만 정상에 막상 올라서고 보니 그때부터 아무것도 안 보였다. 남의 수를 익혀 올라갔지만 정상에 오른 후부턴 나의 새로운 수를 찾고 개발해야 하니 막막했다. 바둑은 갈수록 어렵다. 바둑이 100이면 이제야 고작 2~3을 아는 것 같다.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

▲깨달음이다. "나 이렇게 바보야"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 그 자체를 깨닫는 것이 고수다. 그래서 더 노력하고, 그만큼 더 내려놓을 수 있다.

―바둑과 함께한 인생은 어땠나.

▲바둑판에서 얻은 깨달음이지만 어느 인생이나 근본은 같다. 대통령도, 길거리 노숙자도 인생이 힘든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몸이 힘드냐, 마음이 힘드냐의 차이 정도가 있을까. 그렇게 본다면 어차피 힘든 길, 조금이라도 즐겁도록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 생각을 갖고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책에 사인을 청했다. '무심(無心)', 직접 쓴 글자가 눈에 띄었다. 이겨야겠다는 욕심을 비워내고 평상심으로 최선을 다하기 위한 좌우명이라고 했다.
말머리에 밑줄을 그어두었던 구절을 다시 읽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이긴 것이다." 전설의 승부사가 인생을 통해 몸소 보여준 말이 가슴 찡한 위로를 안겼다.

seilee@fnnews.com 이세경 기자

△62세 △전남 목포 △1962년 9세 나이로 프로 입단 △1966 일본기원 초단 △1980년 한국바둑 전관왕(9관왕) △1982년 9단 승단, 한국바둑 전관왕(10관왕) △1986년 한국바둑 전관왕(11관왕)△1989년 제1회 응창기배 우승 △2002년 바둑문화상 우수기사상, 은관문화훈장 △2010년 제1기 대주배 시니어최강자전 우승 △2013년 바둑대상 시니어기사상, 제4회 대주배 시니어 최강자전 우승, 바둑nTV배 팀서바이벌 우승 △2014년 시니어 바둑 클래식 시니어기왕전 우승,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 국제페어바둑대회부문 우승 △2015년 시니어 바둑 클래식 왕중왕전·시니어기성전·시니어국기전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