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스타트업 창업 생태계 틀을 바꾸자] <2·②> 자생적 창업환경 위협하는 제도·장치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9.23 17:26

수정 2015.09.23 17:26

2. 대기업, 벤처 지원 '빛과 그림자'
대기업, 스타트업 든든한 울타리 역할.. 혁신센터 지원 받은 창업·벤처들, 1년 새 매출 급성장
대기업 의존구조는 벤처 자생력 갉아먹어.. 대기업 지원 받은 중기들, 기술유출·특허소송 부작용도
자생적 성공모델 발굴이 해법.. 대-중기 상생 속, 벤처 지식재산권 확실히 보호해줘야
40배 대구혁신센터 C-Lab 프로그램
원단 캐드 프로그램 개발업체 '월넛' 매출 작년 3000만원서 1년새 12억원으로 늘어
30% 특허무효심판서 중기가 이기는 비율
대기업, 특허무효심판 통해 벤처들 기술 탈취 대기업의 공동특허 요구 거절하기 힘든 이유
대기업이 주는 물은 잠깐뿐.. 벤처, 뿌리 깊은 나무 돼라
[스타트업 창업 생태계 틀을 바꾸자] &lt;2·②&gt; 자생적 창업환경 위협하는 제도·장치

2011년 2월 핀란드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국가경제의 25%가량을 책임지고 있는 노키아가 휴대폰 사업 매각을 발표했다. 이는 핀란드 경제의 사망선고와 다름없었다. 4년이 지난 핀란드 경제는 지금 어떨까. '노키아 쇼크'에도 핀란드는 여전히 유럽 강소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수많은 스타트업(창업초기기업)이 생겨나면서 벤처의 메카로 거듭났다.
역설적이게도 핀란드의 스타트업 성공신화는 노키아의 실패에서 시작된 셈이다. 노키아 출신 직원들은 회사가 망하자 정부 지원 아래 앞다퉈 창업 대열에 합류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접해봤을 모바일게임 '앵그리버드'를 제작한 로비오가 이때 만들어졌다. 전 세계 모바일게임 시장을 평정한 '클래시오브클랜'의 슈퍼셀도 노키아의 유산이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이를 두고 "노키아의 재에서 스타트업이 성장했다"며 노키아를 '핀란드의 피닉스'라고 표현했다. 스스로 불을 붙여 몸을 태워 죽은 뒤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고대 이집트 신화 속 '불멸의 새' 피닉스를 빗댄 것이다. 핀란드 사례는 대기업이 지원하는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스타트업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 우리한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정 대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가 건전한 스타트업 생태계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길다'는 옛말처럼 대기업의 스타트업 지원은 밝은 면과 어두운 구석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삼성그룹이 지원하는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가 이달 15일로 확대·출범한 지 정확히 1년이 지났다.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의 창업·벤처기업 육성프로그램에 가입된 업체들이 하나둘씩 성과를 내면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어 가고 있다.

삼성의 경영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든 'C-Lab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의 창업.벤처기업 육성프로그램은 스타트업의 우수한 아이디어가 사업화될 수 있도록 경영·기술 멘토링 및 창업지원 교육, 국내외 투자자로부터의 투자 유치 기회 등을 제공하고 있다.

원단 캐드 프로그램 개발업체 '월넛'도 C-Lab 프로그램 덕을 톡톡히 봤다. 이 업체는 지난해 매출 3000만원에서 올해는 12억원으로 40배 성장했다. 이경동 월넛 대표는 "개발자들이 모여서 만든 스타트업이다 보니 인사, 세금, 회계, 법률 등에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며 "제일모직, 삼성벤처투자 등에서 멘토가 한명씩 나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전했다.

실제 C-Lab 프로그램에 등록된 벤처업체들은 삼성과 대구시가 공동으로 조성한 펀드로부터 투자받은 금액이 총 17억4000만원에 달한다. 또 초기 지원금 2000만원을 포함해 전문가들의 심사와 단계별 평가를 거쳐 사업화까지 팀당 최대 5억원까지 지원됐다.

광학·산업용 내외장 보호필름을 개발·생산하는 세일하이텍도 LG그룹이 전담 운영하는 충북창조경제혁신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이 회사는 LG화학이 점착제 조성물 및 충전용 스웰링 테이프 특허 실시권을 무상 제공하면서 수년간 정체됐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세일하이텍은 LG화학의 보유기술을 활용해 기존 제품보다 성능이 더욱 향상된 2차전지 적용소재인 '스웰링 테이프'를 생산하는 제조공정 특허를 신규 출원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미국과 중국 등에 해외 특허 출원을 추진 중이다. 박광민 세일하이텍 대표는 "우리의 기존 기술에 LG의 특허를 더해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고 생산성도 혁신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전국 14개 창조경제혁신센터가 본격 가동되면서 스타트업 발굴과 지원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국내 벤처기업 생태계는 대기업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구조다. 대부분의 벤처기업들이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있는 탓이다. 실제 2000년대 중반 삼성전자 애니콜의 세계적인 흥행으로 정보기술(IT) 제조업종의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가 대폭 증가했다. 2010년에는 국내 조선업계의 활황으로 기계·장비 업종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

대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는 벤처산업 생태계의 자생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기업의 지원을 받다 보니 대기업 관심 분야나 사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수년간 시스템반도체 업계에서 창업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이 메모리 분야에 집중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2000년 전후로 창업한 티엘아이, 텔레칩스, 실리콘웍스 등이 시스템반도체 스타트업 1세대로 첫발을 내디뎠지만 이후로는 뚜렷한 성과를 남긴 개발업체들이 전무한 실정이다. 대기업이 인수에 소극적이다 보니 성공적으로 기업을 매각하고 이 자금으로 재창업을 하거나 가능성 있는 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 사례를 만들지 못했다.

대기업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구조도 문제다. 대기업은 그동안 중소기업의 기술을 손에 쥐기 위해 내부인력을 매수해 기술자료를 빼내는 수법을 주로 썼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소기업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에 대한 공동특허를 요구하거나 법적 분쟁이 최소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상당수 개발업체들이 대기업의 지원만 기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대기업의 공동특허 요구를 거절하면 대기업이 원천기술을 둘러싼 사이드 보호기술 특허들을 대상으로 특허무효 소송을 진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꼬집었다.

부실 특허를 방지하고 선행 특허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특허무효 소송이 대기업에는 중소기업이 출원한 특허기술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원혜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에 따르면 우리나라 특허심판원의 특허무효심판 인용률은 2014년 기준 53.2%로 미국과 영국, 중국, 일본 등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벤처기업과 대기업의 상생도 중요하지만 자력으로 성공하는 벤처기업 육성에 힘써야 한다고 목소리가 높다. 스타트업이 자체적으로 거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벤처 생태계 육성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용성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은 "개혁보다는 상생할 수 있도록 대기업이 벤처기업 지원을 늘려야 한다"며 "특히 연구개발(R&D)과 관련된 지식재산권 문제에 있어서 벤처기업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스타트업의 자생력 확보를 위한 환경 조성도 중요하다. 이용성 회장은 "네이버나 카카오톡 등 성공 벤처기업을 발굴하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벤처 성공신화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나오는 만큼 IT서비스 업종에 대한 투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이를 위해 심사인력을 현재 700명 수준에서 3배 가까이 늘어난 2000명으로 대폭 늘릴 계획이다. 현재 3년 미만 기업으로 규정하고 있는 초기기업에 대한 투자방향을 업종별로 세분화해 효율적인 투자가 가능토록 조정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스타트업 맞춤형 지원모델을 찾는 것도 좋은 대안이다.
스타트업이 생각하는 대기업의 지원과 대기업들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스타트업 정책 사이에 간극이 커 상호 소통을 통한 협력사업 구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양원호 SK텔레콤 동반성장팀장은 "무한경쟁력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며 "출발점은 연구개발(R&D), 마케팅, 중소기업 경영진의 기업문화 개선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SK텔레콤의 맞춤형 창업지원프로그램 '브라보! 리스타트'를 예로 들며 "대기업의 경우 중소기업과 함께 성공할 수 있는 사업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며 "중소기업 역시 정부와 대기업에 의존하기보다는 우수인력 채용, 자기계발, 기업문화 수립을 통해 비전을 달성할 수 있게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특별취재팀 조창원 팀장 김병용 김용훈 고민서 김은희 기자 원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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