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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주식시세 전광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0.26 17:06

수정 2015.10.26 17:06

1867년 11월 11일. 투자자들의 탄성이 터졌다. 주식시세를 곧바로 전해주는 주가표시기가 첫선을 보였기 때문이다. 발명자는 아메리칸 텔레그래프사에서 전신기사로 근무하던 캘러헌. 그는 특허를 팔아 당시 10만달러를 챙겼다. 폭 2.54㎝(1인치)의 기다란 종이끈에 상장사 이름과 주가.거래량이 찍혀 나왔다. 속도가 느리고 고장이 잦아도 표시기는 주식투자 가능지역을 미국 전역으로 넓혔다.

그 후 에디슨이 금과 주식을 위한 만능 시세표시기를 만든다. 당시 증권사는 시세표시기를 통해 들어오는 주가를 고객이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칠판에 기록했다.

증권시장이 국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설립되면서부터다. 일본기업 자금조달을 위해 만든 이 취인소(거래소)는 1932년 조선 첫 선물거래소인 '인천미두취인소'와 합병한다. 그 산물이 '조선취인소'다. 이후 1949년에 국내 최초 증권사인 대한증권이, 53년에 증권업협회가 설립됐다. 이를 국내증시의 태동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국내증시는 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맞는다. 새로 상장되는 주식을 사기 위해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부터 인근 여관에서 새우잠을 자고 나온 사람들로 증권사 앞은 장사진을 이뤘다. 1979년에는 증권거래소가 서울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해 여의도가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객장에 처음으로 시세 전광판을 도입(1981년)한 증권사는 대신증권이다. 종이전표로 주문을 넣고 흑판과 분필로 시세를 기록하던 당시로서는 혁신적 변화였다. 전광판은 투자자를 객장으로 끌어모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주식 시세를 단 1초라도 빨리 알 수 있었다. 전광판이 빨간색으로 뒤덮이는 날이면 객장에 있는 고객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주가가 폭락하면 시세 전광판은 화풀이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투자자와 희로애락을 같이한 전광판은 증권사 지점의 상징물이 됐다.

시세 전광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신증권이 내년에 본사를 명동으로 이전하면서 전광판을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홈트레이딩시스템(HTS) 활성화로 시세판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어들어서다.
주식뿐만 아니라 펀드,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 금융상품이 다양해지면서 굳이 전광판이 필요 없다고 보고 있다. 스마트폰 영향 탓도 크다.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을 활용한 '손안의 객장'이 늘어나서다.

sejkim@fnnews.com 김승중 논설위원